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 김수강 | 2017-11-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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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행 9:27)
유대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진 사울에게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전에 사울은 자신의 옳은 소견을 따라 행했지만 이제는 성령의 말하심을 따라 행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난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할 때는 성령님께서 막으셔서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아라비아 3년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모든 것을 다 막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 훈련을 통하여 자기소견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라비아 3년을 거쳐야 합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아도 기가 막힌 상황 가운데 죽은 자처럼 갈 수 밖에 없는 아라비아 3년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사울은 핍박하는 자였지만 예수를 만나 새사람이 된 바울은 제자들에게 회심한 이야기를 하며 사귀고자 애를 썼는데 그들은 두려워하며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않았습니다. 경멸하고 배척하고 받아주지 않았던 그들에게 사울은 끝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예전에는 상종치 않았고 보잘 것 없는 천한 자들에게 상종할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예수를 만나고 나니 계급사회의 높낮이가 없어졌고 구원받은 주의 사람으로서 너무 귀한 형제들이 된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믿지 못할 기이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삶이 기적이고 표적이며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입니다.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구원시켜 주고 상급주시는 하나님이 아닌 이 땅에서 함께 하셔서 앞서 길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피부로 온몸으로 체험하며 가기에 하늘의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육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기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이한 일, 감춰진 일, 아라비아 3년이 육으로 볼 때는 고난이고 저주받은 인생, 버림받은 인생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춰진 시간들을 통하여 영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육의 소욕을 잠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복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섭리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기복신앙을 가진 자의 해석은 막혔던 것도 열려야 하고 안 되던 것도 되어야 하는데 생명노선은 그렇지 않습니다.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갈 때 어려움이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나는 걱정하고 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나바를 준비시켜 놓으십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가서 중재의 역할을 합니다. 사울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증거했지만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했던 사울의 말은 듣지 않았지만 성령 충만하고 섬김과 헌신으로 본을 보였던 바나바가 원수가 회심을 했다고 하니 믿어주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중재로 사도들이 사울을 받아드렸습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이었는데 공동체에서는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의 뜻은 위로 자, 격려 자, 누군가를 세워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말과 행동, 신앙의 됨됨이의 열매로 선한 영향력을 끼쳤던 자였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 바울이 말하지 않아도 바울의 심정을 잘 알고 연약함을 잘 알아 그때그때마다 변론이 뛰어난 자였습니다. 우리에게 사울이 바울이 되는 회심과 변화의 삶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바나바와 같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위로 하고 세워주고 살려는 내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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