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 최은숙 | 2021-05-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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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복은 위로부터 옵니다. 아무리 좋은 옥토도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황폐한 사막이 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택을 입히시려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잘 듣고 삶으로 적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재앙으로 교회는 자원하여 문을 닫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정지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세상에 속한 교회가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주님이 통치하시는 교회입니다. 세상소리보다 하늘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말씀을 좇아가는 성전입니다. 복 받을 자는 재앙 가운데도 주의 전에 나오는 자이고 복 받지 못할 자는 잘 나오다가도 두려워 나가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의 가장 중앙에 있습니다. 사면이 막히고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인데 하나님은 그 나라를 주목 하셨습니다. 약하고 힘든 나라를 택하셔서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들을 통하여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세계만방에 복음이 증거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 빼앗겼던 이 세상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심장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영광을 흔들며 모욕하는 풍조가 만연하는 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 가는 사람을 바이러스 전파자로 취급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거짓되고 음란한 악한 시대에 진리이신 주님만이 우리 인생에 답이심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또 이것을 증거하고 사는 삶이 가장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을 받은 자만 아는 것입니다. 영적세계에 복 있는 자가 되려면 육의 세계와 타협하지 말아야합니다. 말씀이신 영생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본성을 따라가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선택해야하는 귀로에 많이 서게 되는데 잘 못된 선택으로 인생에 고난을 겪게 됩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선택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어리석은 결정으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의 정체가 잡혀가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 우상입니다. 우리는 해서는 안 될 결정과 선택을 말씀을 기반으로 해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잘못된 결정을 하여 정치적인 입지와 세상의 안전을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 바라바를 내어주는 선택을 하고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17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골고다로 오르셨습니다. 주님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인류의 대속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사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자발적으로 나오신 것입니다. 골고다를 해골이라 말합니다. 모욕과 수치가 있는 곳입니다. 잘 썩고 잘 죽는 해골이라는 곳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고 동산이 아닌 해골이라는 곳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가 해골이 되게끔 하나님은 이끌어 가십니다. 나의 생각과 의도 죽고 나의 자랑도 죽고 다 빠져 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우리를 오르게 하십니다. 십자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형벌의 십자가가 주님이 가운데 계시고 좌우편에 강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류가 이 형벌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안식이 가득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종신도록 일해도 가시와 엉겅퀴만 내는 형벌의 십자가가 우리 인생 가운데 놓여진 상태입니다. 우리는 내 인생 내 실력으로 살아 갈 줄로 아는데 인생 만사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할 일 없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이 가장 복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형벌의 가시와 엉겅퀴의 삶에서 도저히 소망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 앞에 맡기고 말씀을 좇아 삶에 적용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십자가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구레네 시몬이 있습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에는 감사와 기쁨이 없습니다. 병든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이 죄인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말씀이 필요합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자는 말씀을 안 듣습니다. 구원의 가치를 안다면 말씀이 하나님이시므로 말씀 앞에 생명을 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감사가 없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와 형벌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십자가가 구원의 십자가로 바뀌기 위해서는 구원을 강청해야합니다. 한편 강도가 예수님을 바라고 구원을 강청하여 구원의 십자가가 되었고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구원의 십자가로 바뀌어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고 아들이 사도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교회를 세우고 명문 가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저들이 맡았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형벌의 십자가가 아닌 구원의 십자가로 바꿔 주시기 원하셔서 대속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의 예배가 아니라 구원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8절 예수님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입니다. 그 중 한편 강도가 주님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고 예수님께 구원을 강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와 내가 낙원에 이르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도는 예수님을 조롱하다가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순간의 말 한마디가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구원 받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강도 중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평생 믿어도 변하지 않아서 염소 떼로 가는 자가 있는가하면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서 변화를 받아 양의 무리로 가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한 자인지 예수님이 필요 없고 나의 열심 나의 소견대로 열심히 사는 자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자칭 의인이라 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모르는 구원이 불확실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의로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인임을 알아서 주님의 구원이 절실하고 당신의 나라에 이를 때에 나를 기억해달라고 강청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주님 때문에 의롭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에 결정적인 순간에 구원을 놓치지 않고 강청하는 우리기 되어야합니다.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시던지 그곳이 골고다이고 해골을 만드는 곳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가려면 타락한 육의 본성이 해골이 되어야 들어갑니다. 이때부터 해골이 되는 하나님이 다듬으시는 과정에 들어가면 말씀대로 삶이 해석이 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도 사방이 열려지지 않는 환경도 깨닫게 되고 해석이 됩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이 내가 지은 죄에 비해서는 너무나 가볍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100% 죄인이기 때문에 온 몸으로 당하는 모든 삶이 다 아멘이 되고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나면 우리의 십자가는 어느새 구원의 십자가로 바뀌어 있습니다. 죄를 모를 때는 형벌의 십자가이고 가시와 엉겅퀴만 내고 늘 남 탓하고 문제를 삼습니다. 보는 것마다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억지로 지는 형벌의 십자가가 아닌 구원의 십자가로 바꿔야합니다. 구원 때문에 말해야하고 구원 때문에 행동해야 하고 구원 때문에 예배드리고 구원 때문에 사는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고 죽는 것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아멘이 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골고다가 아니면 내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죽음에 직면해야 골고다가 보입니다. 그 골고다에서 나에게 해골이 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거룩을 위한 신앙고백이 있어야합니다. 십자가는 죄패를 붙이고 내가 죽어야 할 곳입니다. 골고다라는 나의 삶의 현장은 나의 영광과 이름을 내는 곳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달려서 해골이 될 때까지 죽고 감당하고 희생하고 헌신 하면서 내안에서 영생하시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온 나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던지 상황마다 인정중독 칭찬중독 일중독 자존심중독 이런 것을 십자가에 죄 패를 붙여야합니다. 주님의 죄 패를 쓴다고 인간들이 다 썼지만 죄기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내 놓은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역사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뼈 속에 있는 죄를 가감 없이 다 끌어 내 놓고 인정하고 시인 할 때 쾌활해지고 화답이 되며 기쁨이 됩니다. 마태도 자신이 세리였던 죄 패를 늘 붙이고 바울도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죄 패를 붙였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보내시던지 그곳이 골고다이고 그 곳에서 십자가에 잘 못 박히고 죄패를 붙이며 주님 앞에 구원을 강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죄와 함께 하나하나 죽어지고 내 안에서 사망이 조금도 없는 빛의 세계 빛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아서 좋은 결과가 없었습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있습니다. 필요해서 만드셨고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십자가 처형의 죄 패를 붙이는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와 로마 헬라 말로 기록 했는데 이것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왕이시라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합니다. 우리교회는 별다른 지파로 말씀이 우리 죄악의 뿌리를 찍어내고 있습니다. 자존심 상하고 힘들고 속이고 싶지만 우리의 더러운 속성을 다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심문을 해도 죄가 나오지 않으시지만 우리들은 끊임없이 사건마다 내가 알지 못한 숨겨놓은 죄악이 너무나 많습니다. 계속 죄패를 붙여서 내안에 죄를 끌어내어 빼내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말씀의 빛이 들어가면 뱀의 독이 안개 사라지듯이 떠나가게 됩니다. 말씀을 받고 그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중심을 보시고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유대인들은 거부를 했는데 이방인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만방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21절,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죄패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하는데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땅히 쓸 것을 썼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빌라도가 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아래서 빌라도가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해야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해서 구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 계획대로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주님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은 해골로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주님의 거룩한 형상을 위해서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감당해 내야합니다.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는 수치당할 일들만 준비 되어 있고 나를 해골로 만들 일만 준비 되어 있습니다. 나를 해골로 만들고 연단을 받을 때 절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해골이 되어져야 합니다. 온갖 죄패를 다 붙여도 아멘입니다. 하고 인정하고 벗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존심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명하지 말고 거짓증거 하지 말고 내 죄를 고백하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실제이신 주님이 오시면 안 들어나는 것 없이 다 드러나게 하시고 시인하게 하십니다. 시인 할 때마다 죄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 되고 내가 변하면 가정도 변하고 공동체도 변하고 어디로 보냄을 받던지 보내신 자리도 변하게 되어 살아 계셔서 함께하시는 주님을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우리 입의 고백이 딱 하나입니다. 주님을 만난 자는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도와 주셔야 합니다. 하는 고백이 나와야합니다. 24절, 예수님은 고난 중에도 말씀이 응하여지게 하는 것을 고백하십니다. 말씀대로 살고 말씀이 이루어져서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말씀으로 살아 내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의 자리 골고다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 되어야하는데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내가 해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헌신 봉사 충성한다고 가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보고 자신의 죄를 오픈하고 죄패를 붙이고 수치를 알아 구원을 강청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습니다. 자신의 죄를 보고 애통하며 흘리는 눈물을 주님을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날마다 새롭게 시작합니다. 무에서 유로 새롭게 창조해 가십니다. 오늘 주님 앞에 고백 할 것은 저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고백을 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빈 마음 깨끗한 심령으로 주께서 무엇을 담으시고 쓰시던지 주께서 마음껏 써달라고 무릎 꿇는 우리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내 죄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 할 수 있도록 주님을 바라보고 갈 길 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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