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 최은숙 | 2021-03-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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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은 잡히실 줄 아시고 자원하여 게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 역시 십자가 질 것을 알면서 가서 감당해야 될 곳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이지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길을 예수님 따라가는 제자들도 있고 무기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유다와 같은 자도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부류에 속했는지 빛과 어두움을 갈라내면서 그것이 푯대가 되어 열려지는 길 위에 우리의 정체를 바로 잡아서 믿음의 길로 돌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는 어떤 제자인가? 말씀을 통하여 돌아볼 때 내가 가진 권세와 능력이 무기가 되어 말씀이 응하여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씀은 빛이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이 우리 심령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유실하는 유출병이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 지난 일년간 재앙의 시간을 보내면서 재앙에 두려워 떨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생명의 시간을 놓쳤을텐데 부활의 생명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신 영이 우리에게 재앙이 두려워 떨지 않게 하시고 일 년을 지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의 진행하심이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손에든 무기가 무엇인지? 경험과 지식, 직분, 말씀을 들은 것, 충성 했다는 것으로 예수님을 파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응하여지는 것을 져버리고 방해하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는 깨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하실 일을 다 아시면서 당신을 잡으러온 유다와 그 무리들 앞에 당당히 나가십니다. 이 고난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는 것을 아셨고 이것이 말씀이 응하여지는 사건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사건과 고난 속에서 당당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아니면 여기에 빠져 들어가는가? 또한 주위에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할 때 나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이 모든 사건들이 말씀이 응하여지는 사건으로 묵묵히 받아내고 믿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그로라.’하면서 내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말씀을 통하여 잘 점검하여 적용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가 주시는 잔으로 피하고 도망하지 않고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죄인에게 심판받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이고 마귀사냥입니다. 예수님이 수난 받으시는 시기가 밤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면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부활의 영은 밤이고 낮이고 묵묵히 받아내고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빛이라.”하십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쓰시고 계셔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가 얼마나 힘든가를 편집해 빼 놓았습니다. 이것은 말씀이 응하여지는 것으로 부활의 영으로 넉넉히 이기고 가는 것으로 생명의 노선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지는 사건으로 알고 성화와 구원을 이루실 것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노라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앞에 별의별일을 격지만 넉넉히 부활의 생명으로 이겨내는 역사를 요한이 모든 일을 생명으로 본 것처럼 우리도 생명의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오직 영광만을 나타내며 생명의 노선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명은 부활이 무엇이지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아우성치는 것이 아니라 유유히 묵묵히 이겨내는 것입니다. 밤을 맞이하기 전에는 베드로가 제자들 보다 뛰어난 줄 알았습니다. 남들이 못하는 것 감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밤의 때가오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제자들은 다 흩어지고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도마는 의심하고 누가 큰가? 시기와 질투가 충만 하였습니다. 밤의 때가 오면 믿음 지키기가 힘듭니다. 자기 의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어두움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밤의 때나 낮의 때나 구원의 역사를 묵묵히 진행시키고 가고 있습니다. 도무지 막을 길이 없고 이런 사람은 세상도 감당치 못합니다. 불같은 연단이 와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갑니다. 우리에게도 밤의 때가옵니다. 이때 넘어지지 않으려면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합니다. 지금 이 시대가 밤의 때입니다. 어디나 소망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어두운 재앙의 때를 잘 지나가야 합니다. 1절,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해드리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영광을 받아 주시기를 자신을 위해서 기도 하시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을 보전 시켜주시고 이 세상에 빠지지 않게 해주고 거룩을 입혀 주실 것을 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제자들을 통하여 구원 받을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런 시내를 건너 게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습니다. 우리도 늘 말씀을 따라 가는 제자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2절. 예수님이 가신 감람산은 모임의 처소였고 기도의 처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다 아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것이 복 있다 한 것처럼 어떤 사건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다 드러나게 해 주셔서 다시는 이 습성을 못 쓰도록 드러내셨구나 하고 죽을 것을 잘 아는 복 있는 사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죽을 상황이 올 때 내가 그로라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주님이시지만 예수님을 잡으러온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한 자, 유대교를 교란시킨 귀신 들린 자라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결박하여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안에 육을 상황과 사건으로 드러낼 때에 내가 그로라 인정만 하면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가장 사랑 받았던 유다의 이름이 찬송이란 뜻입니다. 그런 유다가 한 밤중에 무리를 이끌고 무기를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5절 무리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물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를 찾는지? 자신의 심중에 나와 아버지만 아는 마음에 동기와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예배에 나왔고 무슨 뜻으로 교회에 나오고 있는지? 그 목적이 기복인지 구원인지 오늘 말씀에서 심판하십니다. 생명으로 들어가면 오늘 이 말씀이 복이 되는 것이고 육으로 떨어지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당하실 일을 다 아시고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내가 그로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보내신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왔기 때문에 내 생명을 스스로 버리노라 하시는 것입니다. 임박한 수난 앞에서도 제자들의 가는 길을 용납하라 하신 것은 내가 붙여주신 제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끝까지 길을 열고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당당한 모습 뒤에 베드로의 섣부른 행동이 나옵니다. 고난의 잔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서 예수님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전이 되면 때마다 시마다 여호와의 영광과 임재가 있는 심령이 되면 눈빛 하나에도 앞에 있는 심령의 속의 어두움이 엎드러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 한마디로 죽은자가 살아나고 병든자가 고침 받는 하나님의 역사가 오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어리석게 예수님을 파는 유다의 영이 떠나가기를 축복합니다. 누구를 찾느냐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주관하고 가시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역사나 오늘의 환경 우리의 인생을 주도하시는 주관자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르고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셔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들이 주님의 사명이고 아버지의 말씀이 응하여지는 사건입니다. 복음은 장차 받을 환란의 시작입니다. 복음이 들어오려면 내 나라가 무너지고 말씀으로 새롭게 구원의 세계를 열어 가시고 내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영적 전쟁으로 혼란은 이미 허락된 것입니다. 미리 말씀을 받아 예방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해석이 되고 답을 알고 가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밤의 때는 악인들이 번성하고 활동하는 시기입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육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밤의 때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밤의 때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성경대로 응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밤의 때를 어떻게 맞이하시고 반응하셨는가? 잠잠히 묵묵히 당신 가실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고난이므로 기뻐 뛸 수는 없지만 가야할 길을 가야합니다. 들을 소리 듣는 것이고 치러야할 값을 치르는 것으로 알고 묵묵히 가야 합니다. 밤의 때의 사명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감당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연결 되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께 묻자와 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고 늘 기도해야하고 그때그때마다 말씀에서 내 정체를 보고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애쓰는 훈련을 통해서 밤의 때를 맞이하면 답을 찾아 갈 수가 있습니다. 밤의 때는 인간의 열심과 열정으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열심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열심이었습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열심은 베드로처럼 십자가의 길을 막는 자리에 들어가 말씀이 응하여지는 것을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열심은 없는 것이 낳습니다. 이 열심이 교회를 방해하고 무너지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도는 제자의 도입니다. 제자는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고난이 옵니다. 제자도의 사명은 자신을 버리고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뜻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너를 부인하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사명으로 내게 주신 잔을 마실 줄 알아야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니 그때부터 고난이 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는 것은 무리들입니다. 무리들은 먹고 배부른 까닭에 따랐습니다. 큰자가 되어 영광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천국의 기초석이 됩니다. 우리는 무리가 되지 말고 제자가 되어야합니다. 11절, 예수님은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생명의 대속의 제물로 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영웅적인 행동은 외적으로 보면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고 행동 같지만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가 주신 잔으로 대항도 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본질이 다 나옵니다. 거짓말, 합리화, 남 탓, 우리 속에 있는 부패된 속성들이 다 나타납니다. 주님은 체포를 당하시면서도 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사망에 넘겨주고 사망에 속한 우리들을 건져 내시기 위함입니다. 사망에 던져주면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입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망에 넘겨짐을 당할 때 사망이 삼키다고 생명이 삼켜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성육신하셨을 때도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신 것을 입증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인성으로 있지만 우리 심령 가운데 말씀이 임하셔서 말씀을 따라가는 생명의 사람인 것이 삶 속에서 구별 되어야합니다. 부활의 생명은 요동하지 않고 관대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사망에 들어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에서 나오십니다. 이것이 사망을 이긴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사망의 협박이나 우겨쌈을 받아도 부활의 강한 능력으로 해를 당하지 않고 생명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심령의 그릇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산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힘이 아니라 순종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잔을 주님처럼 자원해서 지기를 원합니다. 제자가 되면 마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가진 무기로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칼로 베는 혈기를 부렸습니다. 우리는 검을 가진자가 아니라 말씀을 가진자가 되어야합니다. 베드로는 세상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기 싫어서 휘두르는 나의 칼은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고의 잘린 귀를 다시 붙여주시고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넣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의 열심으로 휘두르던 칼을 칼집에 꽂으라는 말씀이 응하여지는 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진리의 영을 받아야합니다. 아들의 영이 오면 세상도 감당치 못할 믿음으로 사망권세 깨트리고 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의 죄를 다 사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처럼 어디에서나 나 하나 죽으면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한마디만 참으면 됩니다. 구원이 목적이 되는 인생은 말씀이 응하는 인생입니다.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는 인생입니다. 삼년동안 양육한 제자에게 은 삼십에 팔리는 것도 말씀이 응하여지는 사건인 것입니다. 삶 속에서 직면하는 슬픔과 괴로움 배신 고통 이런 사건들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고 이런 고난의 잔을 잘 받아 마실 때에 우리 인생 또한 다 이루었다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한날 한날을 이루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으로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유다의 영이 떠나가기를 원하고 순간순간 구원을 파는 자 되지 말아야합니다.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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