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자가 되라 | 이명빈 | 2021-06-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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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20:24-31절 개역개정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는자가 되라>
오늘 우리가 한번도 못본 유대인의 한남자을 우리의 구세주주로 믿어진다는것은 은혜중에 은혜이다. 요한이 요한복음을 마무리하면서 왜 도마에 대한 기록을 해놓았을가,아무리 성령을 힘입어 말씀을 증거해도 믿지 못하는 표대가 있기때문이다. 늘 의심하고 불신하는 까칠한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돌이켰던것처럼 우리도 돌이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게 위함이다. 24절:도마가 열두제자중에 한사람으로 삼년반동안 공동체 생활하면서 양육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찾아왔는데 도마가 그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렇게 표대를 믿고 모든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왔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열일을 제쳐놓고 신앙생활을 잘해왔는데 되는일이 없는것처럼 이제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 절망하고 좌절하고 받은 상처도 컸을것이고 예수님을 죽인 예루살렘에 게속 머문는것도 두렵웠을것이다. 공동체에서 함께 한다는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우리가 신항생활 할때에 꼭있어야할 자리가 있고 해야될 일이 있다. 복받지 못할사람은 꼭 있어야 될자리를 피해간다. 썩어질 육신을 위해서 자기생각을 도모하고 자기일을 도모하면서 그자리를 비껴갈때가 있다. 우리는 꼭 은혜를 구하여서 흐름을 따라 주님계시는곳에 말씀이 있는곳에 함께 할수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한다.우리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성령이 함께 하는 자리에 공동체 흐름가운데 있어야 될자리에 있어야만 주님이 능력을 받게 되고 영적전쟁에서 요동하지 않을수 있고 승리할수 있다. 25절:도마의 믿음은 내눈으로 확인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내손으로 만져보겠다. 내가 직접경험해 보지 않고는 누구에 의하여 믿지 않겠다. 도마는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 믿음은 확인이 아니고 확신하는것이다. 확신은 내힘으로 안되고 성령 받으셔야 한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전에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공회에 잡히게 되고 구속당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데 죽은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거야, 세번이나 말씀하셨다. 도마가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않아도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리를 딱들으면 주님의 말씀은 기억 나야한다. 우리도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속에서 항상 주신 말씀이 기억나야 된다. 말씀을 붙잡고 승리해야지 사람좋아서 쫒아다니지 말아야 한다. 무조건 맹목적으로 신앙생활하는것도 맹신일수 있다. 치밀한 의심의 과정을 거쳐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것이 되게 까탈스러워서 주변사람을 피곤하게 하는것같지만 이 도마의 스타일은 실수가 없고 신앙의 성장의 기회가 되는것이다. 누가 무슨말을 한다고 치우치고 끌려가고 이러는것이 아니라 자기마음에 확신 얻기를 원하고 제자들이 본 주님을 내가직접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에 간절함이 있기에 예수님이 도마를 찾아오신다. 26-27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니까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니까 수없이 논쟁을 하는것을 주님이 다들으셨다. 우리들이 은밀중에 향하는것을 하나님은 다보고 듣고계신다. 갈등이 충만해서 여러가지 소견을 내놓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신다. 진짜 은혜입은자 평강이 임한자는 세상에 천국이 따로 없다.세상에 지구가 없어진다해도 요동하지 않고 견고한 믿음의 뿌리를 내릴수있는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끼리 한말인데 꼭예수님한테 하신것처럼 다들으시고 도마에게 니손을 내밀어서 내손만져봐 못자국에 손넣어봐 옆구리에 손넣어봐 믿음없는자가 되지말고 믿는자가 되라 말씀하시는데 도마가 거기에서 꼬꾸라지는것이다. 제자들이 믿음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여드레를 지나서 다시 닫힌문을 통과하여 도마를 찾아오시는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같은 나를 찾아와서 꼭 만나주셔야만이 해결받을것이 꼭 있고 우리도 하루를 지나 이틀을 지나 여드레를 지나 찾아가서 막힌담을 풀어줘야 할 지체가 꼭있다. 28-29절: 도마가 의심이 떠나가면서 <나의주 나의 하나님이여> 이고백이 요한복음이 클라이막스다. 우리인생가운데 그렇게 요동하고 불안하고 확신이 있다가도 없을때가 너무많다.이렇게 성령의 은혜가운데 있다가 성령으로 난자가 딱 되여지면 나의 신앙이 <나의주 나의하나님>되여지는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클라이막스가 되여지는것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체험을 했으면서 왜 사건마다 꼭 이렇게 만나서 니마음에 확신이 있어야 믿는거야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것이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는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한번 은혜입었으면 요동하지 아니하고 여전한 방식으로 묵묵히 주의길을 가야 되는데 우리는 강팍하여서 내가 만나기전에는 내가 만져보기전에는 이렇게 믿지 않겠다고 말씀을 저버리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주님은 막13:31절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다. 우리의 경험도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지식도 언제가는 썩어지고 지나가고 없어질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없어져서 그다음세대 또그다음세대 2천년을 통과하여서 세대가 바뀠지만 말씀은 일점일획도 오차없이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이 찾아와 만나주셔서 부활신앙이 되여지니 성령이 인도함을 따라 인도에가서 생명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도마가 순교한다. 30-31절: 제자들이 삼년반 그렇게 양육받고도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부활체로 나타나셔서 어떤때에는 동산지기로 어떤때에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그룻을 바꾸어 나타나시는데 말씀을 하셔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손에 못자국을 보여주니까 알아본다. 우리도 주님뜻대로 살기를 원하여 말씀가운데 순종하고 고난가운데 살아남은 증거가 있어야 된다. 불같은 연단이 와도 유유히 살아남는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가는 이런것을 보여줘야지만이 나를 통하여 주를 만나고 주를 보고 기뻐하였더라가 나오는것이다.예수님이 죽음은 3일동안 무덤에서 증명되였다. 우리도 말씀으로 말미암아 말씀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육체의 소욕들이 죽어졌다는 증명을 받으셔야 한다. 나는 죽었어, 나는 이겼어, 말로 해서 되는것이 아니라 진짜 육의 육성이 죽었다는것은 3일동안 음부에서 진짜 죽은것이 증명되여졌던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죽은자가 증명이 되여져야 한다. 그러니 완전히 죽어지니 죽음을 통과한 육체는 완전히 또다른 육체가 된것이다. 그러니 주님이 모습이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는데 도대체가 겉모습만 변했지 말씀은 동일하시다. 나사렛예수의 모습을 쓸때나 육체를 바꿔쓰실때나 말씀은 동일하시다. 말씀을 보고 믿어야 된다.우리는 외모만 보지말고 그안에 예수의 심령을 봐야 한다. 우리가 눈이 열려야 한다. 우리보고있어도 귀하고 바람을 피워도 귀하고 거짓말을 해도 귀하고 한것은 그안에 씨를 딱 심어놓으시고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이 있기때문에 알면서도속아주고 넘어가는것이다.말씀으로 씨를 심어놓은 심령밭이기 때문에 보기에도 아까운것이다.아버지는 우리의 행위를 보지 않으신다. 심어놓은 씨를 보시는것이다.내안에 심어놓은 이거룩한 씨가 점점 자라서 이심령밭도 거룩한 육체가 되여지면 우리들이 썩어져가는 죽음을 향해서 그타락하고 불법을 향하는자리 더이상 육체가 그렇게 씌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세게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난다.그렇게 되여지면 이전에 통과하지 못하고 막히고 닫혔던 문들이 열리기 시작하는데 부활의 주님한테는 장애물이 없다. 의심하는 자도 풀어주시고 막힌것도 찾아와주시고 이전에 두여워하던것들을 다통과하시면서 길표가 되여져서 문을 열고 가시는것이다. 부활체영광은 그냥 오는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과해야 지만오는것이다.우리는 죽으면 망하는것 같고 죽음은 저주받는것같다. 죽을수 밖에 없는 환경오면 우리는 분하고 원통해서 펄펄뛴다. 그런데 따지지도말고 묻지도말고 환경이 밟아주는대로 죽어보라. 그러면 영광의 부활체를 입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때부터 성령께서 보호하시고 성령이 절대적이 분이 되신다. 22절:성령을 받으라 하시는것은 생명의 영, 살리는영, 부활의 영이 우리심령가운데 오셔야 썩어질 정욕도 죽어지고 악한 습관들도 죽어지고 새롭게 창조함을 입고 갈수 있다. 성령없이 죽는것은 트라우마가 생기고 원통하고 분하기만 한다. 성령을 힘입어서 죽게 되면은 문을 굳게 닫게 두려워하는자가 아니라 문을 활짝 열고 부활체를 입고 가기때문에 죽음을 통과하고 나오면은 전혀 다른사람이 되는것이다.바울은 가족 족보와 신화를 자랑하는자였다. 입만열면 나는 베냐민지파요 나는 가멜레일이 문화생이요 하면서 자신이 있는거가지고 자랑하고 사람을 폭행하고 사람을 차별하는데 앞장서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데 혈기 왕성했던자였다. 그런데 주님이 다메섹에서 바울을 만나면서 딱 꼬꾸라지게 하시고 바울의 갖고 있는 육신의 눈을 가져가시고 영안의 세게를 열어주신는것이다. 오늘 말씀듣는중에 우리들이 딱 침을 받아서 그냥 엎드려 죽는자가 되여지고 꼬꾸라지는자가 되여서 더이상 내눈으로 보래야 볼수없고 내말을 할래야 할수없고 주의눈으로 영안이 열려서 보게 하시고 주의 입이 돼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이런역사가 일어나는것이다.바울이 죽음을 통과하고 나오니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였다. 주님이 바울과 함께 하시니 옥문이 열리고 옥토가 흔들린다. 바울의 영이 간수의 마음에 성령이 들어가고 간수의 마음이 녹아지고 귀신들린자가 떠나가고 병든자가 살아나고 통로를 통하여 성령이 임하시는곳마다 이런 역사가 일어난다. 영광의 바울이 닫힌문 막힌문을 열고 다니는것이다. 그냥 우겨쌈을 당해도 꼬꾸라뜨려짐을 당해도 누구도 그부활의 능력을 받은 바울을 감당할길이 없는것이다.그러니 부활의 능력은 오직 죽음을 통과한 사람만 나오는것이다.죽는 환경가운데 자존심 내여주고 유익을 내여주는것이다. 죽지 않았기때문에 죽은 시체냄새가 나고 불법을 향하는 자리에 있는것이다.주님은 내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지만 우리는 내죄때문에 죽는다.주의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될 영원히 기념받을 사람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한다.모조품 되지말고 진짜되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하셔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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