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가 되라 | 최은숙 | 2021-06-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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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는 자가 되라 > 어쩌다 이 복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 각자 영적 수준대로 받아 들일텐데, 세상도 감당치 못할 믿음의 복을 받아서 하는 고백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얼굴도 한번 본적이 없는 유대인의 한 남자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본질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을 때에 주님이 구세주로 믿어지고 내 죄를 대속하신다는 말이 믿어지므로 눈물이 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점점 양육해 가시므로 우리는 믿는자로서 고백하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자로부터 증언을 듣고 믿는 것이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우리의 재주로 예배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되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와 있다고 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믿을 수 있는 은혜가 말씀 가운데 임하여서 우리들의 행위가 믿음의 행위로 바꿀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24절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는데 도마는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함께하지 않으므로 불신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함께 하지 않아 직접 보아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과 불신이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증언하는 것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다는 강한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도마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도 공동체의 흐름 안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야 주님의 능력을 받게 되고 영적 전쟁에서 요동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홀로는 안 됩니다. 말씀의 흐름을 좇아서 주께서 역사하시고 임재하심을 놓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그 응답으로 삶이 열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해도 도마는 예수님 손의 못자국을 보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신하는 것입니다. 확신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도마는 경험적인 신앙을 원했던 것입니다. 믿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깨닫게 해 주시고 예수님을 한번도 얼굴을 본적도 만난적도 없는데 나의 구세주로 믿어지는 것은 특별 은총입니다. 그런데 나는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하신 그 주님을 만나서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갈 수 있는 큰 믿음 큰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면 공의에 잡히게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는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몇 차례나 말씀하셨는데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들으면 제자들의 증언을 듣는 것 이아니라 증언하는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환경과 사건 속에서 항상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사람이 좋아 좇아다니지 말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의 공동체는 날마다 말씀으로 거룩을 입어가는 곳입니다.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주관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그날그날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26,27절,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운데 서서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목격한 제자들과 주님의 부활을 믿을 것에 대해 논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다시 찾아 오셔서 갈등이 충만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십니다. 그리고 도마가 말한 그대로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라 하시는 것입니다. 도마를 신실한 제자로 굳게 세우시기 원하셔서 의문을 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도마가 의심이 떠나가니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우리도 여드레가 지나 꼭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막힌 담을 풀어주어야 증언자가 되어야 할 자가 꼭 있습니다. 28,29절, 도마의 의심이 떠나가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요한 복음의 절정부분입니다. 우리도 인생에 요동을 치다가 성령으로 난자가 되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면 우리 신앙의 절정이 되는 것입니다. 여드레가 지나서라도 꼭 찾아가야할 도마 같은 사람이 있고, 도마 같은 나를 찾아와 말씀으로 만나 주셔야만 해결 받을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면 나를 요동케 했던 불신도 게으름도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 하십니다. 한번 은혜 입었으면 요동하지 않고 묵묵히 주의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다음세대를 위하여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승천하시면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주님이 보내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듣고 믿는자가 될 것을 알려 주십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보내주신다 하시는 아들의 영을 받고 성령이 임한자를 통하여 말씀이 증거 되면 듣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허공을 치지 말고 성령 받은자가 되어 우리가 한 말이 자녀나 가족, 주변 이웃에게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증거라고 예수님의 말씀이 날마다 믿을 수 있게 은혜를 주시는데 우리의 강퍅함으로 내가 만나 보기 전에는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말씀을 져버리는 일이 심히 많습니다. 그러나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경험도 지식도 인생도 언젠가는 지나가고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대가 바뀌고 바뀌어 2000년이 지나도 말씀은 일점도 오차 없이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렇게 도마는 부활의 주님이 만나 주셔서 부활신앙이 되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인도로 가서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게 됩니다. 천지창조가 믿어지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우리처럼 강퍅하고 우상숭배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나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이 믿어지고 나를 천국으로 입성 시키신다는 것이 믿어지고 이 땅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더 이상은 썩을 이 세상과 육체로 살아가지 않고 썩지 않을 부활체를 입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30,31절 요한이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명 입은 증거는 평강입니다. 삼년 반 동안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고난의 흔적을 보여주시니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불같은 연단이 와도 유유히 살아남아 주님을 바라보고 가는 것을 보여줌으로 나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주를 보고 기뻐하였더라가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릇들을 통하여 나를 만나 주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어도 두려워 문을 닫고 있었는데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치해 주셔야 두려움이 없어지고 평강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몸이 있는 부활체를 증명하시기 원하셔서 베드로와 같이 먹기도 하시고 몸을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계속 양육을 받으면서 부활체를 입게 되면 부활 생명을 가진 육체는 죄악 된 육체와는 또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죽음을 통과하고 세상을 밟을 수 있는 부활의 생명이 우리 심령 가운데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육성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이 되어야합니다. 구원의 공동체는 부활체를 입을 수 있도록 영생으로 이끄십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육을 쳐서 말씀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이 살아나면 몸도 부활체를 입어서 거룩한 곳에 참예하는 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도 영광의 부활체로 변화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이 역사하시면 영의 움직임이 빛을 발하기 때문에 곱고 멋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주님의 나라가 내 심령에 임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상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형상이 나타나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한 것은 언젠가는 예수 씨가 자라서 부활체로 들어가 것이어서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고 심어 놓으신 씨를 보시고 자라기를 바라시고 언젠가는 변화체를 입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씨가 자라서 거룩한 육체가 되면 하나님의 신성한 세계로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전에 막히고 닫혀 통과되지 못했던 문들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주님에게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의심하는 자도 풀어 주시고 막힌 곳도 찾아오시고 앞서가시면서 길을 열고 가십니다. 부활체의 영광은 죽음을 통과해야만 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을 원통해 하지 말고 죽어지면 거룩한 영광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거룩한 영광으로 살기 위해서는 오직 죽음 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망한 것 같고 저주 받은 것 같지만 환경이 밟아 주는 대로 죽어지면 영광의 부활체를 입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때부터 성령이 보호하시고 성령이 절대적인 분이 되는 것입니다. 22절, 성령 받으라하심은 성령 받으라 하심은 생명의 영 살리시는 부활의 영이 우리 심중에 오셔야 썩어질 정욕도 죽고 악한 습관도 죽고 새롭게 창조함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없이 죽는 것은 트라우마만 생기고 원통하고 분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힘입어 죽게 되면 문을 활짝 열고 부활체를 입고 가기 때문에 죽음을 통과 하고 나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상상도 못할 영광의 세계를 맛보게 되고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자아를 죽음으로 몰고 가시는 중입니다. 날마다 죽을 일 밖에 없습니다. 견디고 또 죽고 보니 이제 하나님의 세계가 나를 통치하시고 나타나시기 시작합니다. 바울도 다메섹에서 고꾸라지게 하시고 영안의 눈을 열어 주셔서 주의 입이 되어 복음을 전개하여 주신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죽을 수 있는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나로서는 죽을 수 없고 부인 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이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영광의 세계를 잠깐이라도 보았다면 죽지 못하는 것이 원통한 것입니다. 이전에 바울은 자기 공로 자랑 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음 가운데로 들어갈 때 주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유유히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과하고 나오니 바울이 완전히 다를 사람이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죽음을 거듭거듭 통과하게 되면 입만 열면 은혜가 되고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변화되면 내가 죽고 내안에 그가 사시므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주의 사랑의 대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 되어서 이전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모습 변화 되어야 합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유익을 내어주고 죽어서 영생으로 가기 위하여 십자가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해야합니다. 남은 인생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파렴치한 니오야단 되지 말고 주의 사람으로 없어서는 안 될 영원히 기념 받을 사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가 분명히 구별 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말씀이 경고합니다. 멸망으로 떨어지기 전에 말씀으로 돌이켜서 주 앞에 바로 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모든 패역이 떠나가고 거짓이 떠나가고 주 앞에 온전히 서서 말씀만 담은 그릇 되기를 아버지는 원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닫힌 문을 통과하고 전혀 새로운 길을 나가게 됩니다. 통과 할 수 없는 문이 없는 것이 부활체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의 말씀과 연합 되면 못 감당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힘 우리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길이 막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비하신 온전한 길 생명의길 영생의 길이 따로 있습니다. 사망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애걸을 하겠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엄청난 복된 길을 열어 두시고 그 길을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통과 할 수 없는 문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부활체를 입고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문이 닫힌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사람에게 죽음은 축복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길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게걸거리지 말고 우리가 구할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한주간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겉으로는 믿는 사람인데 귀신의 처소가 되지 말고 진짜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영광 받으시고 역사하시는 그릇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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