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능과 위엄을 가지신 여호와 앞에서 | 홍양학 | 2014-03-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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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변론의 대가를 보게 됩니다.
빌닷을 통하여 자신을 보게됩니다. 가르치는것과 선생된 자리에서 말만 잘하는 이론으로 지식으로 가득찬 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들은것 아는것 가지고 이룬것 처럼 모든 자의 선생이 되어서 가르칠려고 그러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배우는 자세나 듣는 것은 잘 못하고 설교하라면 기뻐하고 가르치라면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말씀이 먼저 적용되어지고 실천이 이루져야 하는데 말만 잘하는 목사요 선생이 되어 있으니 이 말씀 아니면 어쩔번 했나 싶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욥을 정금 같이 나오게 하기 위하여 연단을 허락하였다고 고백 한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며 해석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듣고 깨달은 것으로 끝나지 말아야하고 이루고 이긴자가 되어야 합니다. 막상 삶 속으로 들어가 이룰수 있는 환경을 주셔서 불순물을 제거 하려고 하니 감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고백은 하였지만 이루실려고 자존심을 찌르시니 못 참고 주절거립니다. 조금만 일이 안되고 상황이 어려워도 낭망하고 실망하는 우리들을 갈등이 없고 요동하지 않은 정금같은 믿음으로 양육하기위하여 연단하시는 줄 믿습니다. 홍수같은 심판이 자존심을 , 체면을, 욕심을, 정욕을 인간의 모든 육성을 쓰러버릴때 정금같은 믿음이 있으면 유유히 흐름을 따라 떠내려 가는 감당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슬려 올라가면 힘들지만 흔들림 없이 순응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자청년처럼 무시못받고 인정못받으면 절대 못참는 이것을 환경에서 드러내시고 무시받고 인정못받을 때 그저 쓰러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다루시고 연단하시는 주님 앞에 나를 맡기는 것이요 정금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빌닷의 말이 진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아는 것으로 들은 것으로 전달하였습니다. 말씀 듣고 소유를 팔아 보화가 자기 심중가운데 생명으로 전환되어져서 그저 눈빛 만바도 힘을 얻게 되어지고 손만 한번 잡아도 위로가 되어지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며 듣는 자들이 살아납니다. 말씀을 담은 임재가 있는 그릇이 되어지면 그 그릇만 움직이는 곳곳마다 어두움이 쫓겨나가게 되어지고 소생하며 회복이 되어집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권능과 위엄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통치하시고 움직이시며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며 생사화복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되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론으로 가지고 있으면 이 전능한 힘이 삶속에서 들어나지 않습니다. 삶속에서 넘어지고 꼬끄라지고 연단을 통하여 체험이 되어질 때 전능자의 힘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 설자가 없습니다. 이 권능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작정하시는 대로 끝내 이루시는 전능자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내가 변화되어야하고 굽혀야 합니다. 나중에 깨닫게 되지만 이것이 가장 자신을 위하는것이요 복된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깨뜨리시더라도 우리를 변형시키고 굴복시키십니다.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세 기한이 이르러 잉태하리라는 그 말씀대로 때를 따라 이루시는 그 것이 전능자의 권능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그 분의 위엄 앞에서 굴복하게 되어지고 말씀 앞에서 나의 악을 깨닫고 그 분을 경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해야 할 우리가 타락함으로 변질되어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우리를 그 권능의 손으로 돈에서, 욕심에서.중독에서, 음욕에서, 얽매인 곳에서 건져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권능의 손으로 건져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렇게 능력을 말하고 부르면서 삶속에 들어가서 관건적일 때에는 권능을 의지하지 않고 사용하지 않습니다. 빚진자와 소외되고 원통하여 아둘람굴에 모인 자들은 권능과 위엄을 의지하여 다윗의 나라를 세운 줄 믿습니다. 원통하고 빚진자들이 그 나라를 다스립니다. 나그네 되고 다 내려 놓은 자들이 누리고 치리합니다. 권능의 손에 붙잡힌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3절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논쟁의 대가 빌닷이 말잘합니다. 우리는 이룬자가 됩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대동하여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시는 그 것을 인간인 우리가 어찌 계수 할 수 있을까... 진리가 생명이 되어 졋다면 남한데 적용 할 것이 아니라 이 광명으로 자신부터 비추어 바야 할 줄 믿습니다. 이 영의 양식 이 밥상을 주신것은 우리를 먹고 살아라고 주신것입니다. 머리에 담아서 남주라고 주신것이 아닙니다. 남을 주게 되면 올무와 덫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 먹고 정신차려 변화좀 되라며 정죄하고 비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권을 쓰므로 보화를 파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밥상이 올무와 덫이 되지않게 하소서." 상황을 보면 먹을 권도 먹지 말아야 될 권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영적이 밥상입니다. 다윗이 또 기도하기를 숨은 허물에서,고범죄에서, 주제넘은 죄에서,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거역하는것 불순종의 삶 이것은 습관적이고 대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뻔뻔하게 발빠르게 달려갑니다. 전혀 모르고 무감하게 가는데 이것이 숨은 허물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묵상하는 악에서 구출 되어야 합니다. 6절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이 말씀으로 우리를 지적할 때 우리가 아멘하는 자가 되면 복이되고 생명이 될 줄 믿습니다. 나는 벌레요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 고백하며 다가 같다면 욥은 위로를 받고 답을 얻었을 겁니다. 나도 말씀에서 눈 열리기 전에는 자신의 실상을 몰랐고 빌닷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벌레같은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셨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큰 은혜요 사랑입니까. 자기 죄와 허물을 진리로 알고 고백하는 것이 차원이 다릅니다. 땅만 바라 보는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구더기를 색채있는아름다운 훨훨나는 나비로 거듭나게 하기위하여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바울이 옛 사람은 지나가고 새 사람 새창조를 고백하고 야고보는 인생을 잠간 있다가 없어질 안개로 비유 하였으며 베드로는 풀 같은 인생이라 하였습니다. 지식과 이론으로 망할 자들을 증거만 받고 이루지 않은 우리를 한걸음이라도 진리로 인도하시려고 생명의 씨를 심으시고 모시고 동행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피조물을 통하여 인생을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서 말씀앞에서 자신이 누군지 깨닫고 부자청년처럼 공로들고, 돈가지고 ,충성가지고 ,헌신가지고, 했다는것을 가지고 나오지 맙시다. 논쟁거리 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앞에 위엄앞에 서면 할말이 없는 것이 우리입니다. 마지막 장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고백하며 회개하는 욥을 보면서 내 자신을 한번 권능과 위엄의 하나님 앞에서 더듬어 보며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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