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가두지 못한 복음 | 김수강 | 2017-07-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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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행5:19-20)
주님의 능력에 쓰임 받는 사도들을 종교지도자들이 옥에 가두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말씀을 비판하고 공격하며 거부했던 이유는 시기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각색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기에 믿고 나아오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며 허다한 무리가 모여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역사가 사도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추종하지 않고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의 행적을 따라 모이게 되니 그 말씀을 받고 고침 받은 하나님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시기가 가득하여 감정에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닌지 나의 정체가 들어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모든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이 학문 없는 사람으로는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도들을 통하여 나타난 것을 묵상했다면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생명으로 받아드리는 구원의 역사가 되었을 텐데 이들은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게 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자신들의 기득권과 교만함으로 저버렸습니다. 우리도 예배 자가 되어져서 겉모습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것 같지만 종교지도자들은 말씀을 판단하고 생명으로 받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지한 자가 있을까 심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사도들은 부르심을 받고 주님께서 주시는 권능을 따라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쫒아내며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것이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자이고 기득권을 가진 자인데 우리말을 추종하고 따르는 자들이 사도들에게 관심을 갖는 모습에 기득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비합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나고 회복되고 믿음으로 축복받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이 사도들을 통해 빼앗기고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때문에 감정적으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인 된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표징입니다. 수십 년을 예수를 믿어도 주인 된 자리에 내가 앉아있고 자신의 감정과 의지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주님이 판단하실 때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해석으로 사도들은 죄가 없었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리에서 오직 주의 뜻을 따라 복음을 증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거부당한 이유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한 그들이 기득권을 취하기 위해 복음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삶속에서 복음대로 살고 주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서 삶속에서 말씀을 거부하고 자신의 감정대로 의지대로 살아가지는 않는가? 가두지 못할 복음을 내 스스로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보시길 바랍니다. 옥문은 단단히 잠겨있고 문지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의 생명에 함께하는 사도들이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한계상황에 빠져나가게 되어지고 핍박과 환란도 복음을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신의 손에서 나가야 표적인 것이지 무시하고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을 통해 전해지면 꺼려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구주시고 우리의 주인이시기에 그들의 기득권이 우리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에게는 깨닫지 못해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입니다. 스스로 우월감을 가진 종교지도자들 속에는 자신의 이론과 생각이 옳기 때문에 누구의 지배를 받기 힘들고 남을 지배하는 속성이 우리들에게도 많습니다. 지배를 받지 못하고 자기 식으로, 자기 뜻대로 해야 하는 속성 때문에 주의 일을 하는데도 어려움과 힘이 듭니다. 주님이 온전히 주인이 되시고 만물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로써 그리스도의 머리 아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의 역사를 써가는 모습을 종교지도자들 속에서 발견되어지길 원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깨닫기는 하지만 말씀이 적용되지 못하고 거부하게 되는 이유는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기득권 문제가 제일 어려운데 인정받고 대우받지 못하면 안색이 변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득권을 지고 내가 주인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주인이 되셔야 하는 자리에 내가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기 때문에 생명의 복음을 거부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인생이 없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처럼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도 예배를 안 드리는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삶의 주인은 내 자신이기에 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님의 운행하심과 구원의 기회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의식을 다 갖추었다 해도 삶속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드리지 못한다면 우상숭배자이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한 자들이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아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어지고 사도들을 옥에 가두고 핍박을 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들이 감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어야 할 사건으로 해석을 받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도 주님의 섭리가 있고 복음을 전하면서 핍박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대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가두어 놓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자유케 하시고 풀어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상황을 모르는 것 같고 나를 버리신 것 같지만 늘 나의 사건 앞에 애통하고 힘들어 할 때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대에 계산하고 계시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조급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실패를 하기도 하고 병이 들기도 하고 고난이나 핍박을 받기도 하지만 그 고통 가운데 주님께서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켜봐 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셔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면 열리는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라는 뜻은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현재적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핍박과 위협 가운데서도 부활의 영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현실적으로 생명의 역사가 삶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의 삶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날 때에 생명이 되는 것이고 흐름을 쫒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강가에 우리들이 심겨져 있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생명이 자라나고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주어진 열매인줄 믿습니다. 상황은 옥문에 갇혔습니다. 암사건, 부도사건, 배신과 원통한 일을 당했지만 내가 복음의 사람이라면 외적으로 어떠한 옥문이 있더라도 내안에 생명은 더 이상 가두어지지 않음을 믿습니다. 베드로가 육신의 생명의 위협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삶의 행동의 원리를 분명하게 선포를 합니다.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로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하늘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주의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심문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두려워 떠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졌고 이것이 가두지 못하는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입니다. 나를 비판하고 판다하는 사람에게 묵묵히 죽어가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회개와 감사하는 것이 부활의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심어 우리 안에서 예수가 나타나길 원하시는데 예수님의 가신 길을 묵묵히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복음의 증인인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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