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이루었다 | 최은숙 | 2021-05-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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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이루었다 > 인생의 목적을 잘 몰랐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가치 있는 신앙생활을 해 왔을까요. 인생의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고 그 행복이 물질로 오는 것으로 아는 자와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아는 자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죽어도 좋은 인생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세상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시는지를 아셨던 분이십니다. 주님은 공생애 동안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병든 것 고쳐주시면서 구원을 이루고 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2000년 전 육으로 오셔서 하셨던 것처럼 오늘날은 말씀으로 찾아 오셔서 여전히 우리를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쫓아내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있듯이 우리도 짠하고 보여줄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원했는데 아버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십자가로 이끌어 가시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사건이 최고로 위대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를 살려내는 유익한 인생이 되는 것보다 위대한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받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에 적용을 해서 삶이 해골이 되기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 좇아 가야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오르시는데 베드로와 도마도 보이지 않습니다. 호언장담했던 그들의 신앙 고백이 있어야할 구원의 순간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탄 할 때는 주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지만 십자가가 들어서면 아무 소용이 없는 고백이 되고 맙니다. 십자가에 오를 때만이 하늘 문이 열리는 역사 구원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줄 알지만 사실은 이론에 불과하고 실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면 우리도 도망 갈 수밖에 없는 육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공식이 있습니다. 죽음 뒤에 부활이 있고 죽지 않고는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의 생명이 없이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죽음을 행하여 인도해 가시는 주님 앞에 골고다로 오늘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호언장담이 나의 결단이 나의 신앙고백이 나의 충성이 나의 열심이 아님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 같고 실패 같아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다 흩어 졌던 제자들이 다시 주님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떠나고 나니 자신들의 악하고 나약한 실체를 본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대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오면 저주와 축복이 나눠지게 됩니다. 육의 사람은 십자가가 절망적이고 낙망하며 십자가 앞에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가 만 천하에 폭로가 되면 십자가의 피 공로 없이는 구원을 이룰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철저한 죄인인 것을 알아 비로소 구속사의 주인공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온갖 추악함이 다 드러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부인되어야하는데 십자가가 자신의 삶에 적용이 되면 자신을 부인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부인하고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주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내 안에서 나타나실 주님의 영광이 전혀 없는 인간들입니다. 악한 인간들 가운데서 구원을 이루고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서 빛이 임해서 엄청난 축복을 받고 누리고 가는데 이 복이 주께로 왔는데 자기 재주로 된 것처럼 오만을 떨다가 재앙을 심판으로 주시는데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도 주와 함께하면 복과 저주를 갈라내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시는 구원 계획을 영안이 열려서 보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구원이 패가 되어서 십자가가 구원의 은총에 구속사의 쟁점이 되게 해주셨고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 다 알아보고 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은혜에 우리가 붙여야 하는 나의 죄패는 무엇인가? 를 보면서 구원을 이뤄가야 되는 것입니다. 23,24절 우리의 소견대로 우리의 열심과 성향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수 십년간 예배자가 되었다 할지라도 성경대로 말씀이 응하여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로마군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인들의 옷을 부수입으로 삼아 찢고 나누고 이음새가 없는 속옷은 제비를 뽑아 한사람이 가져갔다고 하는 내용이 시편에 다윗이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을 대하여 예언한 것이 이 말씀이 성취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구속사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은 십자가가 인류를 위한 대속의 사랑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전혀 모르고 단지 예수님을 처형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그 크 구원을 외면한 채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무엇인가만을 따지는 인간인 것입니다. 오늘 혹시 말씀 앞에 우리를 인도해내셔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아버지 앞에 내 유익만을 따지는 군병 같은 심령이 될까 심히 두렵습니다. 오늘의 역사에 군병들이 모든 주도권을 다 가진 것 같지만 그들은 구원과 거리가 먼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은총을 받기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이뤄내신 구원으로 은총과 진리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겉옷과 속옷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옷은 옳은 행실입니다. 이것이 세마포인데 예수님이 가지신 옷은 은총이고 진리인 것입니다. 군인들이 나눠가진 겉옷은 나라를 가리키고 신분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분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내가 입은 겉옷은 은총으로 은혜 받고 구원받은 옷인 것입니다. 속옷은 내가 깨우친 진리입니다. 이 은총은 에덴동산에서 물줄기가 네 줄기의 강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 온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충만입니다. 첫째 강은 비손이라는 값없이 흐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값없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둘째 강은 기혼이라고 물이 역류하면서 구스 땅으로 흐르는데 구스는 검은 것을 상징하고 죄를 상징합니다, 셋째 강은 힛데겔이라고 신속하게 흐르는 강물로 들어가기만 하면 살려내는 역사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옷입니다. 넷째는 유브라데 강인데 이물은 너무 달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흘러가는데 예수님의 옷이 흘러가는데 가진자는 은총을 입고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아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속옷은 통으로 짜졌는데 이것은 겉옷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은총이 댜양해도 본질은 하나 그리스도입니다. 진리도 하나 성령도 하나 주님도 한분 말씀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투고 분열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너도나도 죽어서 말씀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시고 은총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구원받은 자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삶 속에서 드러나고 나타나야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은총을 끊임없이 흘려 내려주면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총을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은 진리이신 예수님이 주인이 된 사람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주님의 은총을 입는 이 시간이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25,26절, 십자가 밑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도 빛도 없이 끝까지 주님을 따른 자들이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무엇인지 십자가 밑에 있는 여인들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겨루고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주님을 따랐는데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이 원하는 야망이 완전히 무너지고 좌절이 된 것이라 십자가를 따라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하시고 죽음을 각오하고 십자가 밑에 동참한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요한 속에 넣으시고 생명이 연합 되게하여 그 아들의 영이 예수 속에서 요한으로 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의 공동체를 새롭게 조직하시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늘의 거듭나는 생명을 받아 영원한 세계에 형제자매가 되어서 주님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가듯이 수없이 생명이 생명을 낳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까지 가야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그 안에 있던 영을 요한에게 넣어 주사 거룩한 생명으로 인해 주님과 연결되어 더 이상 요한이아니라 그리스도로 살게 되어 주님과 동일시 된 요한이 주님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많은 밀알들을 우리에게 넣어주셔서 하나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28, 29절,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이 목마르다 하심은 사망의 목마름입니다. 온몸으로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면서 사망의 충만한 값을 치르시느라 목마르시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상황도 다윗을 통해서 시편에 내 입이 말라서 질그릇 같이 되었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님의 표징이 되는 길을 열기 때문에 자신의 힘은 전혀 쓰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사로잡아 고난과 연단으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내 힘을 쓸 수 없는 한계상황은 육은 죽을 것 같지만 이때에 거듭나는 새 생명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악 때문에 구원의 빛이 되시려고 값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치러 주시는데 사망으로 꽉 찬 것이 타는 목마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저주 아래 있어서 더럽고 추악한 더러운 물을 흘러내려서 여전히 주님은 목마르시다 하시는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빨리 변화 되어서 생수를 대접하는 자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에게 붙여준 이웃 심령들에게 깨끗한 생수를 주는 그릇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상대방을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거룩한 구원의 행렬 속에 불러내 주셨으니 복중에 복을 받은 자들로 구경꾼이 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 해 드릴 수 있는 생수가 되어야합니다. 내 죄 때문에 주님이 목마르심을 호소하시며 십자가에 계속 매달려 계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처참한 십자가의 처형 가운데 비참한 절규로 고통을 호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적으로 아버지를 신뢰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도 그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말씀을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져서 가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머리를 숙이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 보내신 뜻을 다 행한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머리를 숙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삶을 하나님께 넘겨드렸듯이 오늘 우리가 주님의 영을 받아서 주님과 연합해서 더 이상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가 되는 인생으로 주님이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가신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가고 마지막 십자가에 내 영혼을 주님께 넘겨드리는 역사가 우리 육의 인생에 있어야할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악한 영이 사로잡고 있는 것을 결박을 풀어내기를 원하시고 주님께서 불러내실 때에 말씀에 반응하여 부르심을 쫓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열어 가시는 주님이 구원을 이루시고 거룩한 형상을 입히시는 엄청난 축복을 헛되이 받지 말고 온전히 받아 누리는 주인공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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