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 최은숙 | 2021-05-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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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저주가 아니고 고난이 아니고 영광인 이유가 부활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망을 깨트리고 모든 죄가 구속을 당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깁니다. 육에서 영으로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로 옮김을 받습니다. 십자가의 완성이 부활이므로 다시 살아나셨다 변화 되었다 이 소리는 영광이 완성 되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 신앙의 여정은 날마다 부활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늘에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입지 못하면 예배 가운데 말씀이신 하나님이 대면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졸고 있게 됩니다. 바울이 부활의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서 거듭나고 보니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이고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결코 이 예배에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고도 실패한 가인이 될까 심히 두려워해야합니다. 평생 예배를 드렸지만 성령을 훼방하고 교회를 시끄럽게 하고 자기 소견을 들이대고 다툼과 분당을 일으키는 역사를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거룩을 이뤄가는 구원의 사람이며 말씀으로 잘 자라야합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심령이 빈 무덤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오직 부활을 위한 것인 것처럼 우리들이 고난을 통하여 육성이 녹아지고 체질이 녹아지는 것은 내 심령이 완전히 말씀으로 지음 받은 성전 되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 생명이 발아되면 많은 밀알을 낳듯이 주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것입니다. 사단은 사망이 끝이고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이는 것으로 끝나고 승리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주님은 사망이 부활로 들어가는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검증 받으셨습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망을 통과하는 시험을 당하신 후에 존귀하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끊임없이 키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연결 된 알곡은 계속 믿음으로 자라고 껍질은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1절,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보고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하는 표현은 현재진행형으로 2000년대로 마감이 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시대 따라 주의 첫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말씀에서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새로운 세대를 만듭니다. 가문의 혈통으로 살아 왔던 모든 저주를 십자가에서 마감을 하고 새 시대를 여는 새로운 시작이 부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인데 수십년 예수를 믿어도 옛 품성과 본성 그대로인 것은 아직 믿음으로 시작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옛 사람으로 창조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은 사라지고 하늘의 생명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새로운 시작이 부활이고 이것을 주의 첫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안식 다음날 팔일 되는 날 주님의 첫날 부활과 동시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것은 주의 첫날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으로 구약에서 미리 예언하시고 말씀하신대로 이루셨습니다. 안식일 다음 주님의 첫날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드려진 것을 상징합니다. 이런 모든 상징적인 것이 우리 심령에 실제로 체험이 되고 말씀이 응하여지는 은혜를 입어야 말씀이 해석 되고 삶이 해석되는 은혜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부르셔서 부르심의 족속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난 모든 것을 난지 팔일째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십니다. 할례를 하는 것은 옛 타고난 본성을 끝내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할례는 율법으로 의례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몸을 베어 내는 것으로 육체에 속한 속성을 제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할레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자로 옛 본성을 벗어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 팔일은 주님의 첫날에 속한 것이고 부활의 생명은 우리 인생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 의해서 부활해서 신성한 생명으로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서 날마다 새롭게 산길을 열어주시고 그 길을 가라하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리돌이 되었다함은 부활의 날은 주님께서 정하신 날로 귀신 처소가 무너지고 새롭게 집을 건축해야하는데 예수님은 모든 유대인들이 버린 돌인데 구원 받을 자는 이 버린 돌을 주워서 모퉁이 돌로 삼아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이 말씀이 응해져서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우리 인생에 새롭게 시작으로 찾아 올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모습으로 찾아오셔서 주어지는 환경에 묵묵히 받아내시며 끊임없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묵묵히 잠잠히 받아내시며 대항하지 않으신 길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환경 탓 사람 탓 하지 말고 묵묵히 받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시며 어떤 사망이 앞뒤로 쏘아대도 평화롭고 잠잠하게 사망을 바라보시며 사망의 영에서 빠져나오시는 것입니다. 사망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부활의 영으로 옮겨져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털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증명은 아무리 사망이 쏘아대어도 사망과 상관없이 유유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보려면 주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주님을 찾고 좇기를 원한 사람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말의 시작이 안식 후 첫날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완전히 죽어서 안식하고 난후 내안에서 주의 영이 말씀으로 시작하고 기도로 시작하는 시작 이 되어 주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라는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믿고 좇았지만은 아직 빛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해서 여전히 십자가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하고 염려하는 것은 마리아가 아직 어두움의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을까? 간절히 찾는 자가 찾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어두움이라도 무덤까지 갈 수 있을 만큼 겹겹이 어두움이라도 끝까지 십자가 붙들고 갈 수 있을 때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무덤 앞에 달려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때 세 부류의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간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계시를 받게 되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발견과 계시는 있었지만 직접 만나는 체험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계시도 받지 못하고 체험도 없는 부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상입니다. 보고 듣지만 간절히 사모하고 추구하지 않으면 절대로 부활을 별견 할 수도 없고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부활 신앙의 주인공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덤 앞에는 큰 돌로 막고 누구도 열지 못하도록 해 놓고 경비병들이 굳게 지켰습니다. 무덤 앞에는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는 자들과 살아날까봐 지키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활을 보려면 경비원들이 삼일을 지켜야했고 우리도 부활을 보려면 사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참고 기다려야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묵묵히 기다리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무덤까지 가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 난 것입니다. 무덤까지 간 자만이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살아난 증거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돌을 들 수도 없고 굴려낼 수도 없는데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켜 돌을 굴려내셨다고 합니다. 우리도 인생에 감당하기 어려운 지진을 만납니다. 지진을 만날 때마다 내가 꽉 잡고 있던 내 안에 있던 죽은 돌들이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을 붙들고 기다리면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돌들을 굴려내시고 부활의 증인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우리들이 몸 된 성전인데 이 안에 더러운 것을 집어넣으면 죽은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세계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불신맨들이 있습니다. 태클맨들도 있습니다. 남들이 하는 일들은 모두 못마땅맨들도 있습니다. 매사에 불평맨들도 있습니다. 비난맨들도 있습니다. 툭하면 삐지는 맨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가로막는 돌입니다. 이 돌은 하나님과 나의 경계입니다. 죽음과 생명의 경계의 문입니다. 죽은돌 막혀있는 돌이 많아서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어야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내놓으면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과 나 사이를 막고 있는 죽은 돌들이 말씀을 통하여 옮기라 하시면 예라고만 해도 옮겨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부활 하셨을 때에 무덤에 남겨진 곱게 개켜진 세마포와 수건은 부활의 증거입니다. 부활을 무엇으로 증명 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거듭났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가운데 시체가 없어야하고 빈 무덤이 되어야 부활이 증명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아무리 찔러도 물과 피만 나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 하는 것은 생명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내어 드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빈 무덤이 되면 주님 앞에 아낌없이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내안에 많은 것을 담아두었더라도 하나님 보실때는 이것은 쓰레기 이고 죽은 시체인 것입니다. 죽을 것 썩을 것 지나갈 것을 가득 담고도 아까워서 무덤을 내어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새 무덤을 주님께 내어드린 것입니다. 주님이 마음껏 쓰실 수 있도록 내 심령에 내가 없으면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직전까지 멸시와 조롱을 받았던 예수님이 요란하고 소동을 일으키는 자였는데 죽은 뒤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묘실에 왕의 대접을 받으면서 곱게 단장을 받습니다. 죽으면 망하는 줄 알았지만 모든 것에 빈 무덤으로 다가갈 때 내안에 막아있던 모든 것들이 걷어지고 죽으면 누구에게나 존귀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9,10절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하신 말씀을 막달라 마리아는 깨닫지 못하고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실상입니다. 남의 중심 도둑질해서 연출해 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남의 중심을 도둑질해서 연출해서 사실화 시키는 것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부활에 대해서 기회만 있으면 말씀하셨는데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고 자기집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는 중심이 없이 기복에 젖어 있으면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일에 두렵고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빼앗겨 주님이 주신 말씀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시는데 정말로 주님의 음성을 듣기 원해서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잠잠하는 세계가 일어나야합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 사단이 와서 참소할자를 찾아 세상을 두루 다니다가 왔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배에 빈 무덤으로 와서 아멘으로 그 영을 받아 드려야하는데 세상 걱정으로 두루 다니고 있는 것이 사단입니다. 빈 무덤이 되어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빈 무덤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니고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부활을 기뻐하며 새 생명으로 이루실 구원의 세계를 사모하고 감동함으로 지켜보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아무런 대안 없이 빈무덤으로 가는 것 같아도 불안해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시작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하나님 말씀하시는 대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성경의 일점일획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성취하십니다. 우리교회가 은혜 입은 교회인 증거가 말씀 주신대로 그대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고 믿음으로 이겨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살아나야 하리는 말씀을 기억해야 하는데 육으로 들어가 무덤 속에 무엇을 채우려하지 말고 말씀으로 어두움을 걷어내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복은 타고나는 것아 아니고 자기 할 탓입니다. 어디를 보내든지 종이 상속을 받을 아들처럼 충성을 하면 상속 받게 됩니다. 이기적인 것을 버리고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자리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묵묵히 받아내는 것이 복의 길입니다. 불가항력의 일도 말씀아래 있으면 말씀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는 말씀을 꼭 붙들고 변화의 길을 가기를 간절히 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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