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를 보았다 | 최은숙 | 2021-05-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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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주를 보았다 > 오늘날 전 세계가 재앙으로 휩싸여 있는데 이 시간 우리가 예배자로 있는 것도 기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주셨을 때 창조주 앞에 구원을 강청하지 않으면 구제불능이 됩니다. 우리는 숨 쉬는 것도 하나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서 우리의 주변 생활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오늘 이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천국입성 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악한 것에서 돌이켜야 하고 잠든 것에서 깨어나야 하고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것에서 말씀으로 고침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가 주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간절히 주를 찾는 자가 주님이 만나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해서 울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고 지금까지 살아 왔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소망이 주님을 위해 헌신 하는 것인데 오직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고 살아왔던 마리아에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 절망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새벽에 무덤으로 향품을 가지고 찾아 올 수밖에 없을 만큼 주님을 사랑했는데 주님의 빈 무덤을 발견한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완전히 정복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세마포와 수건을 가지런히 놓으시고 무덤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을 통하여 돌문이 열리고 무덤 문이 활짝 열리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아버지는 원하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인공이 되면 텅 빈 무덤에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소망이 되고 새로운 시작이 되는 우리의 신앙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가장 절망했을 때에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는데 우리는 낙심하면 주절거리면서 귀신의 냄새 시체 썩는 냄새를 왕성하게 일으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 새로운 시작을 가져오는 사람은 가장 절망적일 때에 향품을 사는 것입니다. 가장 힘들 때 주님을 부르고 감사할 줄 알고 자신을 돌아 볼 줄 알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힘들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빠져들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주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입으려면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 세우실수 있을 만큼 주님 앞에 중심을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주님 앞에 결산을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을 위하여 우리는 중심을 다하여 주님이 받으실만한 제사를 드리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간절히 찾는 자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오직 구원이 목적입니다. 구원의 기준이 죄인을 부르셔서 회개시키시는 것입니다. 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을 강청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할수록 간절히 찾으면 찾을수록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지 않고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할 수도 없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는 눈물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를 아는 자가 어찌 주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부활 생명이 없어서 빈 무덤을 보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요한이라도 부활신앙이 없어서 결국 사명을 버리고 자신들의 옛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아침입니다. 이 아침에 무덤에 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향품을 사서 오게 하신 마음을 주신 것도 주님이 움직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그렇게 간절히 찾던 마리아에게 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어찌하여 우는가? 물어봅니다. 주님의 시신이 없어지고 사람들이 주님을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한다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인내하고 있으면 어느 때인가 주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들도 고난의 자리를 떠나면 절대로 거룩한 형상을 입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묵묵히 받아드릴 때에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고 내안에 패역한 것이 빠지기 때문에 고난의 자리는 구원을 이루는 최대의 무대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도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듣기원해서 떠나지 말고 지켜야 할 빈 무덤과 같은 나의자리를 피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자여 누구를 찾느냐?” 할 때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알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마다 내 의가 강하고 교만 하여 절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이 이 본문을 통해서 깨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알아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습도 동일합니다. 우리기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충성 봉사한다 해도 우리 삶 속에서 함께 하시고 내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외면하고 죽은 예수님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이시고 오늘도 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고 우리가 바른길 가기를 원하십니다.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셔서 찾아오시지만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없고 내가 감동받으면 되고 일주일에 한 두번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스스로 자족하지 말아야합니다. 16절,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불러 주시니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슬픔과 낙심에 있던 마리아가 영혼이 깨어나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삶속에 늘 함께하여 주셔도 내 기준과 맞지 않아 몰라보고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통치 아래 다스림을 받으면서 있어야 합니다. 17절, 인격적인 관계는 평소의 삶속에서 형성이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알려주시는 말씀을 통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원이 시작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께로 올라가신다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이 살아 계서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자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을 통치하시고 이끌어가시므로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원대로 성향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지시하시는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은 우리의 이치와는 완전히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가면 삶이 바뀝니다. 그것을 보고 부활 신앙인 것과 주님을 만난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도 세상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코로나도 어떤 형편과 환경도 예배를 막을 수 없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육을 정복하고 세상을 정복하고 환경을 정복해서 유유히 말씀따라 순종하고 가는 것을 보면서 세상도 감당치 못할 믿음의 부활 신앙을 삶속에서 보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하시고 우리에게로 주님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하셨습니다. 죽어서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는 줄 알았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성령이 거하시는 천국이 되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계시를 따라 갈 수 있는 부활 신앙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안에서 말씀해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열어주시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너희가 알 것이라 하셨는데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눈이 열려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해야 합니다. 이전과 이후가 분명히 갈라져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와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실 때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심령에 어두움이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누가 만날 수 있을까요?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심령 속에 말씀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체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말씀으로 내 안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문을 열고 두드리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내 죄를 보고 세상과 상관없어지는 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 심령 가운데 있으면 ‘주님 한분이시면 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것도 나의 영혼을 만족하지 못하고 갈하고 기근이 걸렸던 심령에 부활의 주님이 오시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족하고 모자람이 없는 주님의 권능이 함께하시게 됩니다. 감사만이 있는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의 세계가 우리의 문 앞에 있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이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한 바울과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와 주님을 의심한 도마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사명을 감당하고 순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환경으로 우리의 목을 자를 때에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회개하고 잘라지면 내안에서 주님이 부활하시고 역사하십니다. 부활신앙은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부활의 주인공들은 성공의 욕심도 없고 영생에 소망을 두고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홀연히 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영을 받으면 무너지고 황폐한 것에 쏘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사명이 더 분명해지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 계시를 따라 움직이는 부활의 영의 역사가 우리의 가치관과 역사를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불러 주셨던 것처럼 말씀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만남이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아야합니다 이 시간 말씀으로 주님의 몸을 떼어 주실 때에 말씀이 들리고 약속의 보혈의 피가 성령의 역사로 와 닿아 아멘으로 화답하고 말씀이 생명되게 하시는 피를 받아서 하나님과 한 몸 되게 해주셔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자 너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는 언약을 받는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 신앙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심령이 천국이 되는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말씀으로 자신을 이기고 정복해서 이긴자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만이 답입니다. 예수로 사는 것 외에는 하늘나라 갈 길이 없습니다. 헛되이 신앙생활 하지 말고 구원을 저버리고 망령되이 받지 말고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는 하나님이 아신바 되는 중심이 상달될 수 있도록 간절히 찾고 구원을 강청하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께서 무너지고 훼파되고 망한 곳에 우리를 보내셔서 부활신앙의 표징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려고 세우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정복하게 해주셔서 부활 신앙이 이런 것이다 너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우리는 믿고 순종만 하면 된다고 보여주시고 이끌어 주신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넉넉히 이기고 잘 감당하여 부활 신앙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원하고 내가 주를 보았다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전하면서 가는 세계가 오니까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 되기를 아버지는 원하십니다. 그 소원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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