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 사랑하느냐 | 최은숙 | 2021-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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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예수님은 살아나셔서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절망과 낙망으로 처절하게 떨어져 있는 베드로를 회복 시켜주시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해서 애통하고 절망하는 심령이 있겠지만 자기 뜻대로 세상이 요리되지 않아서 절망하는 강퍅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주님의 관심은 오직 구원이고 오직 회복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나를 회복 시켜서 믿음으로 온전케 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회복이 되고 살아 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권면하실 때에 이 말씀을 따라 돌이키고 교회를 세워 갈 수 있을지 회복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첫 번째는 두려워서 꼭꼭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세상살이에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눌려있는 그 영을 좇아내 주시고 ‘평안 할 지어다.’ 하시고 평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신대로 아멘으로 받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고 가다보면 주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체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나타나심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을 보시고 만져보고 믿을 수 있게 나타나셨습니다. 세 번째 나타나심은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특심이었는데 이것은 하늘로 부터 온 것이 아니고 자신의 천품으로 자기열심에서 온 것입니다. 남이 할 수 없는 고백을 했지만 주님은 이런 천연적인 힘을 처리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해 호언장담한 열매가 주님을 저주하고 배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환경을 통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고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고 사명을 감당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철저하게 실패하는 것을 허락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특별히 전했는데 그런데 주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려야하는데 육으로 돌아가 분별없는 제자들을 선동합니다. 그런데 이런 육은 처리를 받아야합니다. 주님은 이런 것이 처리되기를 원하시고 위로부터 받는 주님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해서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들을 귀가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복된 귀가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5~17절, 주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이름은 옛날 이름으로 육으로 떨어져 예전 어부로 돌아가서 고기 잡는 일을 독려하고 있어서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호언장담 했고 또 주님을 부인한 것이 부끄럽고 죄송하여 반석 위에 교회를 지으신다는 새 이름을 받은 것이 너무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가 현재 어떤 위치에 떨어져 있는지 그의 현주소를 알려주시기 위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회복 시키셔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주저앉은 우리에게 침륜에 빠진 우리에게 육적 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에게 오늘 찾아 오셔서 치유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메시지가 요한복음을 총괄하는 핵심 주제가 ‘요한복음이 나를 살렸습니다.’하는 고백이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용서를 받고 주님께서 일으켜주시니 자유함을 받고 이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고 베드로를 향한 주의 사랑이 그가 목숨을 내 놓고 순교하는 때까지 주님을 따를 것을 예언해 주십니다.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사랑 때문에 이 시간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고 내가 원치 않는 길을 주님께서 열어 주신다 해도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죽기까지 따라갈 수 있는 부르심을 오늘 말씀으로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네가 의지하고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속성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상기 시킬 수 있는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자랑하면서 사랑하는 자였는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주님 사랑은 특심이었습니다. 성전의 기둥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열심으로 했기 때문에 천연적인 것을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가 주님의 손이 잠시 떠나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이 잡아 주시는 은혜를 모르고 자기 힘으로 주님을 따르는 줄 알고 자신을 신뢰하므로 주님이 손을 놓아 스스로 믿음이 있는지 점검해 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누구라도 나를 믿는 자를 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 모두를 주님의 손으로 잡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환경을 주님이 안배해 주시고 이끌어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우리의 신앙 근원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주님 안에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주님의 공급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세 번 물으셨을까요? 거룩함을 입기 원해서는 사랑이 필수적인 사명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없이는 거룩함을 좇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받아서 그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주님은 사랑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물으심에 베드로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세 번이나 물어보시는 것은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주님의 영을 베드로에게 넣어 주시기를 원하시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위임 받기를 원하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면 됩니다.’ 라는 고백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치유하시고 좌절해서 주저 앉은데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전에 불러 모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요한복음 마무리를 하면서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주시고자하는 생명의 메시지 결론을 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보다 주께서 나에 대해 더 잘 아심을 깨닫고 비로소 베드로가 자신의 말을 그치고 겸손해지는 장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철저하게 실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의 고백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절실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현주소를 아십니다 라고 고하니 주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믿음을 회복 시키셔서 양무리를 인도 해 갈 수 있는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누구라도 붙여준 심령을 생명으로 양육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양을 치라 하심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성전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또 내 양을 먹이라 하심은 말씀으로 양육한 교회를 세우고 그 심령 가운데 먹을 음식이 풍성할 수 있도록 돌보고 먹이고 자라게 하는 이 일을 맡기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나 혼자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는 생수가 생명 샘이 되어서 날마다 흘러 나가는 언행으로 상대방을 살리고 그가 심령성전이 세워지고 주님을 믿고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말씀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 이상은 내가 아니요 주님이 이끄시는대로 주님의 사랑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찾아오셔서 생명의 주님 부활의 주님으로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내안에서 나를 통하여 생명의 공급이 될 수 있는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밖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님이 내 안에서 나타나셔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를 비워드리는 믿음이 필요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떠한 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양은 내 열심과 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범사를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진행 하실는지 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믿을 때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 보다 스스로 나서서 섬기는 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양을 먹이고 양을 치는 복이 어떤 것 인줄을 깨달은 베드로가 말씀의 젖을 먹음으로 자라게 된다는 것을 베드로가 자신의 서신을 쓸 때에 구구 절절히 쓰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양을 먹일 수 있는 젖이 되기를 원하시고 교회가 건축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네게 맡겨진 양을 먹이려면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가야하고 원치 않는 곳에서 죽고 썩어져야 양을 먹이고 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18~19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의 소견 성향대로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성령을 만나서 오후 길을 가게 되면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길이라도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됨을 예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죽기까지 주님을 따를 것을 권하십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가는 길을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순종하며 가다보면 따를 수 있는 능력을 입혀주셔서 우리의 삶속에서 말씀이 그대로 되니라 하는 창조의 세계를 경험해야 합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죽음으로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부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방법으로 양육하시고 이끌고 가시는 그 길 끝에는 십자가 죽음입니다. 진정한 영광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밖에 없는 육이 죽는 것이고 그 길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이고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알고 나니 순교할 수 있는 믿음까지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 순간만 죽었으면 그 영혼을 살리는 길이 열리고 주님이 역사하시는 때가 되었을 텐데 하며 죽지 못하는 것을 원통해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죽을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한 주간 원치 않는 길이 열리면 감당하고 넉넉히 죽을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20~23절 베드로는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 요한을 경쟁상대로 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주님께 묻자 너와 무슨 상관인가 라고 하십니다. 말씀은 항상 자신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를 나의 문제로 볼 줄 알고 기도해야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분수 주제를 알고 섬기면서 살려야합니다. 베드로는 오직 주님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내안에 계셔서 지혜를 주시고 갈 길을 열어주시는 이 보다 더 뛰어난 실제는 없습니다. 젊어서는 내 마음대로 했지만 성령이 내 안에 임재하시면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면서 나의 열심히 아니라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가기를 원하고 내 소견이 끊어지기를 원하고 부르심에 순종하는가? 자신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조건없이 계산없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고 있는가? 나는 죽은자로 내려놓고 묵묵히 순종하며 따라가고 있다면 주님이 들어 쓰시는 그릇이 되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24~25절, 돌이켜보면 은혜 밖에 없는데 우리가 한 것은 저주하고 부인한 것 밖에 없는 것을 고백 할 줄 알고 돌이키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를 찾아와 회복시켜주시고 손 잡아주시는 이 사랑으로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이끌고 가신다 해도 이제는 아멘입니다 하고 따를 수 있는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것으로 주님은 마무리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회복하고 돌이키고 회개해야 하는 나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살아야 하겠기에 우리 인생에 빠져서는 안 되는 21장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오후 길을 가게 하시면서 주님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부활의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시는 이 시간이 우리 인생에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고 이제는 더 이상 배반하고 저주하느라 변명하고 합리화하지 말고 성전으로 잘 건축 되어갈 수 있도록 말씀으로 양육 받는 우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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