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안에 뿌리를 박아 | 최은숙 | 2021-09-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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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안에 뿌리를 박아 > 요한복음 1장 18절 말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신대 볼 수 없는 하나님이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셔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끔 나타나셨고, 그 주님과 삼년 반을 함께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하시고 예수님의 실체가 신성이시고 하나님이시고 능력이시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볼 수 없으나 살과 뼈가 있는 우리를 만나 주시려고 살과 뼈가 있는 그릇을 쓰시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갈수록 말씀을 깊이 깨닫고 알아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실제이시고 말씀은 실제입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걸어다니시고 움직이시고 사람을 만나고 역사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깨닫고 볼 수 있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너무 비천한 그릇을 쓰시고 낮고 천하신데 그 안에 성령으로 임하셔서 그 분이 거느리시고 그분이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안에 하나님이 충만함이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는 예수님을 쓰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듯이 오늘은 우리들을 쓰시고 나타나시기를 원하십니다. 2000년 전 그 예수님이 우리들을 쓰시고 연합하여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세계를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실제이십니다. 그 분은 기도로 귀신을 좇아내시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표적과 기사를 보이셨으므로 선지자 중에 한 분이신가? 하나님이신가? 사람들은 수근거렸습니다. 예수님의 실제를 아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허락 되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걸어가게 되는데, 이 말씀이 생명이라 말은 하지만 여전히 삶속에서는 자신의 본성을 좇아 살아가는 이것이 광야에서 40년을 머물렀지만 오늘 우리는 머물지 말고 아는 것 들은 것으로 끝나지 말고 이것을 삶으로 옮겨서 실제 성령 하나님의 운행하심을 받을 수 있는 삶이 우리에게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암기 했다고 실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야만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 속에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있어 내 육신의 본성대로 율법의 규례대로 움직이던 것이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내 자의로 행하지 않고 그분이 인도하시고 그분이 행하게 하심을 따라 행하는 성령의 나타남 속에서 이제 하나님의 대언자 대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십자가에 처리하신 후에 부활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게 되는데 이것이 생명을 주시는 영, 살리는 영이 되어서 내안에 오셔서 하나가 되고 실제가 되어 그 분 안에서 살고 그 분 안에서 행하고 되고 그 분 안에서 우리 존재를 갖게 되어 바울이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사신 그리스도로 가게 되어 화답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므로 나와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주님의 사역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하셨는데 주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이적을 보고 생활도 같이 했는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늘 함께 하셔도 주님보다 앞서 가면서 불안해하며 염려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 하는가 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당신이 누구신가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답하니 주님은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하시고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계시를 열으사 깨닫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삼년반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양육을 받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시대가 되어 바울을 통하여 예수를 너희 주로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주로 받았다는 것은 주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들에게 이제 예수님을 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주로 받았다는 것이 진리가 되지 않아 여전히 삶 속에 가서는 내가 주인이고 자기 소견이 난무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 아니고는 예수님을 주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주로 고백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예수님을 주로 고백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만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말씀을 들었고 표적과 기사를 보았어도 저주 아래 있어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리 배우고 들어도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 지시하는 잘 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십자가를 거치기만 하면 즉 내가 죽기만 하면 성령님이 비로소 역사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대로 우리도 그 자리로 가야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주님은 영광 다 내려놓으시고 형체도 없이 낮아지셔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주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기 전에 이유없이 환경에 순종하고 말씀을 감당하며 가야합니다. 주님은 30년을 수종드는 자로 지내시고 하나님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하시고 세례요한을 통해 세례 받게 하시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셔서 공생애 사역이 시작 되었습니다. 사역은 내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인치심으로 성령이 시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유없이 한가지로 수종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도 무시와 모욕을 다 당하시고 하나님이 시작 하실 때까지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십자가로 처리 당하는 그 시간으로 주님이 열어 주시는 길 내 손을 잡아 이끄실 때까지 우리는 잠잠케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성령의 역사로 우리 또한 공생애로 들어갈 줄로 믿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심은 이제는 하나님과 막힌 길이 다 열렸다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부활로 승천으로 다시 오마 하신 약속대로 생명의 영으로 오신 모든 것이 우리 앞에 말씀으로 서 계시는 것입니다. 살리시는 영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3절,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로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살아계신 우리의 마음에 심비에 새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호흡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받을 때마다 우리 심비에 영으로 연합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씀을 대면하고 계시니 아멘이 되고, 또한 그 영으로 보게 하시니 말씀이 다 풀리면서 나에게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록된 말씀으로 내안에 영으로 임하시니 구원의 노선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만이 길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는데 말씀이 지식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면서 나의 삶을 운행해 가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 갈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읽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과 발이 움직이는 곳마다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로마서 14장 7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말씀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부활의 생명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이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사는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성령의 운행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자와 죽은자의 주가 되기 원해서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대로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는 과정에 내가 죽지 않고는 안 됩니다. 모든 삶은 제단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 이 세계가 죽음을 계시 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임하시기 원하셔서 길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22편 1절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씀은 다윗이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계시했던 것으로 예수님께서 그대로 실행하심은 오시리라 약속했던 메시아임을 확증하는 고백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아 시편 23장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 찬송을 합니다.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시고 가셨는데 사망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부활하고 나니 여호와가 진정 나의 목자가 되시고 구속주가 누구시며 창조주의 역사가 어떠하시며 나의 주가 되어주심을 고백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망의 굴레에 싸여있을 때에는 땅 아래 밖에 못 보고 자기 소견 밖에 모릅니다. 보이고 들리는 세계 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을 처리하고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주 전체 하나님이 운행해 가시고 하나님은 구원주이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뤄 가시고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나의 호흡조차도 하나님의 손에 움직이는 것이 깨달아지면 여화와를 찬양 찬송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으로 눈을 뜨면 범사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둠이 조금도 없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살아도 영원히 사는 주를 만난 이 생명은 이 세상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생명을 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 되시려고 말씀으로 내 안으로 오셨습니다. 타락한 나의 자아 자존심 때문에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서는 저주 받은 가문에서 건져내 주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난 자의 믿음의 자존감 가지고 세상을 감당하고 정복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존심, 천품, 육성의 종노릇하지 말고 예수님이 내안에 주인이신가를 오늘도 말씀으로 검증받고 한 주간 삶에 나타나는 행동 돌아보고 예수가 주가 된 삶이었는가? 내가 주가 된 삶이 었는가? 예수님을 나타내는 삶이 되어야 예수를 주로 받은 증거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6절, 그 안에서 행하라는 것은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어서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아무도 없고 예수님이 길 자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리라 하시니 삼년 반 동안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주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속에 계신 영이 우리에게 오면 보좌의 운행하심이 다 깨닫게 되고 보여지고 들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예수가 없으면 길이 없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갈등과 방황의길 사망의 길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날마다 우리의 길을 계시하십니다. 영생으로 가고 싶으면 십자가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은자로 주님이 어떻게 역사 하실는지 성령의 운행하심을 따라가기 원해서 주의 역사하심에 귀를 기우려야합니다. 주님이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도 그 길 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거듭났다면 말씀 따라 가기 원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윗 질서에 묻고 따라야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육이 편안하지만 그리스도 안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부인해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전쟁인지 모릅니다. 날마다 영적전쟁을 해야 합니다. 육을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행하면서 뿌리를 박으라고 하십니다. 부활 생명이 심겨졌는데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영적이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늘의 생명을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런 샘물이 되기 위해서 뿌리를 깊이 내려 그리스도로부터 자양분을 받고 내 안에 보좌가 두어질 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지고 보좌에 앉으신 그분으로 인해 내 안에 성전이 되어지니 보좌가 두어지고 아버지와 어린양으로인해 나오는 모든 것들이 만국을 소생케하는 생명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완성이라 나오는 것이 모두 구정물입니다. 시편 1편에 복있는 자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데 우리에게는 남에게 먹여 살릴만한 과실이 없습니다. 그런데 뿌리를 깊이 박아서 믿음이 견고해지고 그 뿌리에서 진액을 올려 주는 생수가 되면 만국을 소생케 할뿐만 아니라 새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과실을 맺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행사가 형통하여 묶인 것 풀어지고 막힌 것 열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안에서 행하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와 합한자는 한 영인 것입니다. 말씀으로 임하신 그 영과 내 영과 연합해서 오직 그 영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하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 있다면 어떤 재앙에도 갇히지 않고 여전한 방식으로 유유히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영의 역사입니다. 7절, ‘세움을 입어’ 이 말씀은 신앙은 체험이 너무 중요합니다. 한단계 한단계 갈수록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셨고 때가 되어서 우리를 부르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롭게 해주시고 의로움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되고 성령을 받아 모든 말씀이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왜 이 길을 우리가 가야하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들은 것을 아는 것처럼 속으면 안 됩니다. 그 길을 오라고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것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 구원을 은혜로 받았다면 항상 복종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두려운 것은 주 밖에서 행하기 때문입니다. 돈에 뿌리내리고 권세에 뿌리내리고 자기사랑에 뿌리내리고 자존심에 뿌리내리고 욕망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면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서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릇으로 택함을 받은 복 있는 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더 이상 사망에 갇혀서 사망을 품어내는 자가 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고 찬송함으로 주께 영과을 돌리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매사에 감사하면 하나님이 보이고 주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생명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이 박히면 그리스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요동하지 않습니다. 뿌리를 주안에서 내리지 못하도록 그리스도 외에 어떤 것에 마음 빼앗기는 것이 있다면 끊어 버려야합니다. 성령 공동체에 가장 훼방 되는 것이 자신의 옳은 소견이고 이방신들의 풍속이고 경험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올곧지 않고 정한 마음이 없고 늘 갈등이 많고 복잡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외의 것이 많기 때문에 늘 갈등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았다면 날마다 말씀으로 세워지고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공동체의 말씀에 세움을 입어야합니다. 골로새교회도 말씀 이외의 것들이 많이 들어 온 것입니다. 모든 것 다 끊어내야 합니다. 말씀만 잡고 가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은 감사함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구원을 목적으로 두면 모든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고난 환란을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하니 다 감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탈 되어서 주님을 대치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믿음이 약해지고 불평불만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순간부터 성령의 역사가 없어지고 믿음이 해지고 어긋난 길을 열고가게 됩니다. 주님과 정상적인 교통으로 주님의 계시를 좇아서 살고 싶다면 먼저 감사로 충만해야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것이 믿음으로 굳게 서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풍성한 열매가 맺히고 감사할 때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 수 있고 감사 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회복해야합니다. 믿는자의 목표가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더 이상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삶을 다스리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끊어내고 오직 말씀만 따라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부리를 내린 사람은 말씀과 공동체 안에서 그저 감사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구원의 길을 어긋나게 가는 여지가 많아서 또 다시 말씀으로 뿌리 내리기를 원하시고 세움을 입기 원하시는 간절한 성령의 탄식을 소리를 들을 아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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