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 최은숙 | 2021-09-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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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 하심은 내 안에 임하신 그분의 역사하심을 좇아서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도록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에서 나오는 윤리 도덕과 같은 선한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 예수의 실상 그 신성의 어떠함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운행하시는 그런 삶을 통해서 드러나게 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세월을 눈먼 자 벙어리로 주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먹으로 쓴 글씨로 받았지 이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를 주관하는 주인이 되어 주시면 ‘안에서 행하되’ 하시는 말씀이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행하게 하심을 따라 그분의 운행을 당할 수 있는 생명 단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 속에 들어가 더 이상은 그들의 임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사도들의 행전이 시작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움직여서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삼으셔서 사도행전을 써내려 가시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지 않으면 각자 객체의 인생인데 그 인생에 주의 영이 임하면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주를 증인하는 전도자의 인생이 됩니다. 성령이 운행하는 역사가 일어나면 우리의 인생이 성령행전을 써내려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약의 모세오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구속사를 써 내려가시는 것이 사복음서와 같고 여호수아는 사도행전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가 죽고 난후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는 인도자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예수의 영이 임하면 사단도 밟고 세상도 밟고 염려와 근심도 밟고 걱정도 밟는 능력이 생명으로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리스도 영 안에서 인도함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생명과 진리와 길이 되신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우리 삶을 주관 하셔서 늘 우리 삶이 긍정적이고 소망적인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상을 꿈꾸고 비전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성한 세계에 소망이 우리를 붙잡게 되어 받은 것 없고 가진 것 없지만 마음은 든든하고 평안하고 세상에 눌리지 않고 담대한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받습니다. 그리고 땅 아래 뿌리를 깊이 박고 땅위에는 세움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폭풍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면 예수 기름 부음 받은 그릇이 되었다면 모든 행위에서 그리스도가 흘러가게 됩니다. 이 단계가 되면 육과 혈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이름으로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역사를 좇아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영은 간단하고 신선하고 단순합니다. 예와 아니오만 있습니다. 주님의 운행하심을 사람이 계획하지 않아도 순종하고 가다보면 어느 것 하나 헛된 것이 없습니다. 성령의 운행하심이 있는 믿음이 실제가 되는 인생으로 우리들을 이끄시기 원하셔서 오늘도 말씀 앞에 초청하시고 말씀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믿음은 인정 하고 인정받는 것이지만, 성경에서의 믿음은 내가 믿는 대상이 내게 와서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마음 가운데 오셔서 나를 다스려주시고 인도해 가시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계시는데 내 심령가운데 역사하심이 없다면 생명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미성숙한 것입니다. 주님이 없으니 당연히 행함이 없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실제가 없고 실제가 없으므로 겸손한 척, 의로운 척, 믿음 있는 척하며 회를 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가 오면 꾸밀 이유가 없고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 날마다 새롭게 창조함을 입어가는 만유의 시작이시고 전부이신 그리스도로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십니다. 애굽신앙, 광야신앙, 가나안신앙이 있는데 애굽신앙은 유월절에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므로 사망의 영이 건너갔습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은 예수님을 가르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보혈의 피로 내가 영벌에 들어가고 사망의 영으로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사망의 영이 건너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유월시켰습니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으면서 힘을 내어 애굽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다보니 세상적으로 속해있던 것에서 끊어지고 말씀을 따라서 천성을 향해 갈 수 있는 말씀에 힘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이제는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육을 떠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과는 상관없이 하늘에 비전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그 단계 단계를 이 땅에서 준비하는 기간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유혹되고 미혹되는 것은 신앙생활은 하는데 세상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건짐을 받아서 출애굽 하여 광야로 들어가는데 애굽에서는 생활의 기반이 있었는데 광야는 오직 하나님이 만나 주셔야 되고 메추라기를 허락 해주셔야 되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셔야 되고, 반석에서 물을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구원만이 중요했는데 광야에 오니 육이 매우 불편합니다. 이제는 육성대로 살 수 없고 교회공동체의 말씀을 통해서 양육을 받고 가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났기 때문에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육의 요구가 응하여지게끔 허락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따라서 갈 수 있게끔 인도해 가십니다. 하늘의 만나를 먹다보니 성막을 짓는 은혜를 입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활을 거쳐 가나안 신앙이 되면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 삶이 있는데 이 안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성전이 되려면 먼저 터 잡고 있는 나의 육신의 본성 일곱 족속을 쳐 내야 해야 합니다. 이때는 만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내 안에 임하신 주님이 그때그때 말씀을 주시고 인도해 가시고 보호하시는 땅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소산을 먹으면서 누리게 되는 역사가 가나안신앙입니다. 광야신앙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구원주가 되셨습니다. 말씀을 먹으면서 성막을 짓고 세상과 짝하지 않고 죽던지 살던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흐름 좇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애굽보다는 광야가 광야보다는 가나안이 점점 더 깊이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옛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계시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님의 역사 뿐 만아니라 마귀의 역사 또한 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전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데 육성 가운데 감춰져있는 일곱 족속이 구속사를 쓰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만 그리스도의 풍성한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내 본성을 정복하지 않고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4절, 옛사람은 마귀의 조정을 받아서 속이는 자입니다. 거짓아비의 인도를 받아 자신이 속이는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8절에는 신앙상태가 애굽도 아니고 광야도 아닌 영적인 생활을 누리면 누릴수록 세미하시고 정확하셔서 빛 가운데 먼지가 드러나듯이 믿음이 약할 때는 죄가 죄로 보이지 않았는데 믿음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영의 세계가 열리면 열릴수록 죄가 느껴지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각까지도 죄를 걷어낼 수 있습니다. 사단으로부터 온 생각이 그럴듯하게 하나님의 것 같아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을 분별해 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두움과 빛의 역사가 완전히 드러나고 알게 됩니다. 영의 사람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을 보입니다. 육의 사람은 말을 해줘도 알아 듣지 못합니다. 신앙은 성숙할수록 무서운 전쟁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깊으면 깊을수록 미미한 생각 하나도 언제 타고 들어왔는지 어두운영을 잡아 낼 수가 있습니다. 장성한자의 싸움은 내 영이 죽느냐 사느냐 이 시간을 은혜의 때로 구원의 시간을 잡느냐 유실하느냐 하는 치열한 전쟁을 해서 생각 자체가 늘 긴장하고 깨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 십 년간 주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리스도를 좇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고 회개 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면 회개보다 더 큰 은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뼈 속 깊이 박혀있는 저주의 죄악들 때문에 통회하고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기독교인이 되면 교회를 무너지게 하고 사람들의 구원의 세계에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자기 죄로 고통스러워 하다보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은혜의 때를 만나게 되고 그 시간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는 사망에서 건짐 받아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굉장히 중요한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세상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 경계하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는 영혼을 노략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교재와 떡을 떼어야 합니다. 사람과 교재하다 보면 그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받게 되어 혼선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너희를 사로잡을까 조심하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철학은 굉장히 그럴듯한데 안에 들어가면 생명이 없고 텅 비고 공허한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꾸몄는데 잡히는 것이 없고 사람을 속이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골로새교회도 가만히 들어온 이단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혼합주의 유대 율법주의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인간의 사상이나 생각에서 나오는 잘 못된 기초에 세워진 어리석은 것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쓰게 된 배경입니다. 골로새의 혼합주의를 말씀으로 갈라내듯이 우리 안에 혼선된 혼합주의 자기식 빚어낸 예수가 허울을 벗고 온전한 진리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이 심하고 삶속에서 불이익이 있어서 틈을 타고 들어와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면 그냥 유혹되어 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 세상과 교회가 적당히 믹서 되어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속이고 속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의인인 것같이 성전 뜰을 밟았지만 멸망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악인이 악한 일에서 돌이켜 회개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회개하지 않고 멸망하고 맙니다. 육체의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정신적인 죄이고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교만이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속이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 없이 스스로의 기준을 삼아서 신앙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정답을 들이대도 그것은 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지어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합니다.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합니다. 성경 이외에는 가감하지 말아야합니다. 자기만의 율법을 만들어서 옳다고 주장하고 그것대로 하려고하는 것이 사람의 유전을 좇는 헛된 속임수에 속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할 수 없도록 막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는 것이라고 비하하며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은 사람의 행실에서 나온 교훈으로 종교적인 의식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본문이 지나가기 전에 헛된 철학과 헛된 속임수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은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살다보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말씀을 떠나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왜 나를 부르셨는지? 왜 이 일을 하게 하셨는지? 전혀 모릅니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도 전혀 체험하지 못합니다. 만유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에 대해서도 모르고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그 생명을 머리로 삼아서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된 영으로 속고 속이면서 미혹 당하는 자 되지 말고 오직 말씀 외에는 가지도 말고 하지도 말고 말씀 좇아가기를 원합니다. 일 좀 했다고 왕노릇하고 기득권을 행사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헛된 속임수를 가지고 성령 공동체를 훼방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쳐서 말씀 앞에 복종시키고 주의 뜻을 이뤄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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