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신 십자가 | 최은숙 | 2021-09-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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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살리신 십자가 >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에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 예수가 임하시면 그 이후부터는 핍박이 따르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주장했던 세상 임금이 떠나가야 하므로 영육 간에 영적전쟁이 치열해지는데 그것이 우리 인생에는 핍박으로 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인 복음이 핍박을 받고 훼손당하고 때로는 변질시키려는 사단의 궤략의 공격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이 올수록 사단의 공격도 더욱 심해지고 유혹과 미혹이 굉장히 많습니다. 믿음에서 떨어지고 공동체에서 떨어지는 것이 마지막 때가 되면 더욱더 심해집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상황을 영적전쟁에서 맛을 보고 있습니다. 골로새교회도 성령으로만 한 길로 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곁가지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골로새교회에 침투해서 변질시키는 영지주의 율법주의 사상들에 대해서 바울이 조목조목 일깨우고 양육해 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가 진행되는 동안에 복음 외에 우리를 변질 시키고 훼손시키는 그 어떠한 사상들이 하나하나 제거 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11절,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표징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내가 죄를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서 생명으로 역사하시게 되면 그리스도의 할례를 입게 되는데 이때부터 죄가 하나씩 끊어지는 은혜가 옵니다. 죄를 미워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사모할 때에 하나님이 할례를 입혀 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표시인데 죄를 끊어 낸 그리스도의 할례는 유대인들이 육적으로 행했던 할례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할례는 육적인 요소를 완전히 벗겨내는 것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고 이것이 세례 받는 것입니다. 12절, 우리 믿는자들 속에서 주님의 영이 오시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에 대해서 죽게 하시고, 다시 그 속에서 일으키셔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즉 그리스도의 영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때에 십자가와 함께 이미 장사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의 반열에 인치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해 온 즉시 그 때부터 이미 내 육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인 것입니다. 죽은자가 되면 그 이후에는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아나시고 나도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 세례인 것입니다. 물세례는 의식적인 것으로 내가 전혀 죽지 않은 상태에서 내 의를 좇아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진정한 세례는 성령세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절로 죽어지는 은혜를 입게 되고 생명으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성령세례는 완전히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야 하는 것으로, 세상의 철학과 초등학문을 좇아가서는 이룰 수 없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일으키시고 이끌어 가셔야합니다. 요한복음 12장 9절에서 11절에는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님 앞에 몰려오는데 이들이 오는 이유는 예수님을 보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리신 나사로를 보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는데 대제사장들은 유대교를 떠나는 사람들 때문에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모의를 합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예배자가 되어야합니다. 마태복음13장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씨를 뿌려도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는 밭이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인데 아무리 씨를 뿌려도 자라지 않는 것은 마음 밭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수없는 말씀을 들어도 말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스림도 받지 않는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가는 심령은 밭이 완악한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수없는 예배의 단을 쌓아도 이 땅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패역하고 교만해서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것은 내 본성대로 내원대로 살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신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때문에 말씀으로 우리영혼이 소생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영혼이 소생 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져서 육이 있는 동안 거듭나고 변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유대인의 사람들이 세상적인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오듯이 오늘 우리도 그 자리에 있다면 탐심을 근거한 믿음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말씀을 죽이라고 대드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영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영이 죽어 있으면 영의 말씀을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입니다. 완악이란 말씀보다도 자신이 위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영이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구원만 깨어지면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 육을 가지고는 아버지 나라에 갈 수 없기에 육을 처리 당할 때 오는 고난과 핍박을 기쁘게 감당 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재가 이뤄지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어 성령에 취해 있게 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감옥에 갇혀 피투성이가 된 바울은 표적만 구하는 그들에게 성령의 인도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마음을 다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큰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날마다 새 일을 행하실 수 있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잠언에 빈궁이 게으름에서 온다고 했는데 영적 게으름은 오늘이라는 이날을 통해서 신랑주를 맞이할 수 있는 기름이 짜여지고 자기부인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일에 가담하게 되는데 영적 게으름으로 나태해서 세상 줄을 끊지 못하면 말씀을 듣고도 열매가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아 우리를 통해서 큰일을 하셔도 우리 마음이 더럽고 음란하면 주의 역사하심이 열매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외모로는 진짜 믿음 있는 주의 사람으로 신실한 것 같은데 우리의 심령 밭은 완악하고 하나님의 영이 거할 수 없는 영이 될까봐 영적 게으름에서 일어나야합니다. 우리의 영은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저주로 꽉 차있는데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영을 소생 시켜주시고 내 영과 함께 해주셔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13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에 계시 된 구원의 경륜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산자 같지만 영은 죽은 자인 우리를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리스도의 할례를 입혀 주시고 그 생명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살리시고 의문의 율법을 다 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영의 권세를 다 벗겨 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응하여지는 진리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3절, 14절, 영이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시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 죄도 함께 죽고 그 분을 부활시키실 때에 우리도 함께 부활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죄를 다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우리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홍빛 같은 죄를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은 인간을 사망과 저주에 결박 된 것에서 풀어내셔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그 과정 가운데 우리를 이 자리에 두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결박을 풀어낼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는데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가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응해야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루어지지는 것이 보이지 않아 인간적인 방법을 다 해 본 아브라함에게 태의 열매가 죽어 생산이 불가능 할때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때에 이삭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일을 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는 것은 태의 열매가 죽은 가운데 주셨으니 드리면 또 주실 것을 믿고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모방하고 흉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다보면 육적인 소욕이 다 빠지면 그 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초등학문과 헛된 철학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 힘으로 살아 갈 수 없도록 팔과 다리를 다 끊어 놓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몰라 예수 믿는데 어려움이 오는가하며 되는 일이 없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약속하시고 100세가 다 되도록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아브라함의 육의 소욕의 기가 다 빠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내 임의 대로하는 속성이 다 빠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명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가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을 받으면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도 감당치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에 끄떡도 하지 않고 영의 통치를 받고 세상의 통치를 받습니다. 성령의 통치를 받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영에 속했기 때문에 사단의 역사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십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며 주님의 영적인 세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세가 창세기에 없었지만 하나님의 영을 받고 창세기를 썼고, 스데반이 성령 충만해지니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기 원하여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를 사도행전에 기록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으면 부활시키시는 것을 보았고 태의 열매가 죽으면 망하는 줄 알았는데 성령으로 난자 이삭의 세계를 만났고 성령의 역사 속에 들어가면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요 물질도 하나님의 것이요 건강도 자식도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바치라하면 바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14절, 법조문은 영적 판결문입니다. 하늘은 법정이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자로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삶속에서 판결문이 있는데 우리가 잊고 있던 죄들도 낱낱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도말하여 주시고 생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자가 우리들입니다.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하나님이 죄를 처리하시고 우리를 부활시키시고 사망을 이긴자가 되어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아브라함이 이 길을 갔고 또한 우리기 갈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는데 왜 세상에 매여 종이 되어서 염려하고 사는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내 삶의 나의 주인이 되시면 주님 한분만으로 됩니다. 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고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온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욕심대로 안 되어서 아우성을 치고 있지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구원이 깨어지면 할렐루야 찬송하면서 천성을 향하여 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면 만족함이 없고 원망 불평하고 염려 걱정하고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고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으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권력자와 통치자는 사단을 말하는데 우리를 결박하고 있던 혈통으로 타고난 저주와 세상의 모든 권세와 정사자들을 주님께서 이기시고 우리도 주님과 연합하여 이겨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의 권세를 포로로 잡으셨습니다. 지금은 비방 받고 조롱을 받아도 우리 안에 그 속성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받게 하신 것이고 죽고 벗다 보면 예수의 사람이 되어서 당당한 역사가 일어나고 그것은 사단의 권세가 껶여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늘 나보다 앞서가시고 일을 이루시고 싸우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삼고 주의 충만하심을 믿으면서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고 열어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이고 진리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 진리를 받아야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십자가로 시작해야 합니다. 믿음이 왔다는 것은 십자가를 적용해서 나는 죽었다는 소리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십자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이고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포기하고 하기 싫은 것 품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는 끊임없이 끝없는 사랑입니다. 조건 없고 계산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더 깊이 고민하고 숙고하고 갈등을 겪으면서 선택하는 것이 사랑의 결단입니다. 결론은 죽는 것이고 품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용납하고 내 죄를 거울삼아 보면서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헌신의 자리로 끌고 가고 십자가로 끌고 가고 감당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경험할수록 놀랍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없이는 죽고 참고 감당하고 헌신하고 충성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재앙의 때에 우리의 힘이 십자가에서 시작되고 십자가의 능력 아래 있는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아니면 요행을 바라며 다른 길을 찾고 있는지 보아야합니다. 또, 내가 이기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며 주님께 기도하는 일은 무엇인지 묵상해 보고 죽지 않는 죄성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역사가 일어나야합니다.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사랑이 내게 없어서 애통하며 하루하루 십자가지는 적용을 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을 헛되이 받지 말고 말씀과 동행하여 나를 살리신 십자가 죽은 것 같지만 부활로 다시 살리시는 타락해서 멸망할 영을 죽이시고 영원히 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 십자가가 정점입니다. 십자가로 오늘도 시작하고 십자가로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역사가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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