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와 그림자 | 최은숙 | 2021-1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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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체와 그림자 > 인간의 본성은 악합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태어난 인간의 본질은 사단의 속성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나무 뒤에 숨고 허물을 가리고 감추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을 자는 말씀 앞에 고꾸라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교양이 있고 세상의 학문이나 도덕 윤리나 의식으로 덮어 놓는다 해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인생의 경륜이 있어서 가리고 덮어 자신도 속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건드리면 본성이 올라오는데 본인도 그 더러움에 놀라게 됩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했는데 한번 뱀의 독이 들어오면 우리의 폐부를 장악하고 있어서 미음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항상 사람이 계획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 하셨다고 할 정도로 선한 것이 없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시더니 살면 살수록 인생 가운데서 세상은 참 악하다 그 속에 함께하고 있는 나도 참 악하다는 것이 절로 고백이 됩니다. 이것을 돈으로 교육으로 교양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속주인 주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능력으로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본성에서 한 치도 벗어날 자는 없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은 교리를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거듭남으로 새로 태어나야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거듭나는 것은 아니고 변화되지 않아 애통하며 주님을 사모함과 살려주시기를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심령들을 찾아와 주십니다. 진정 사모하는 중심이 우리에게 있어야합니다. 주님과 친하게 지낸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기별을 했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 썩은 냄새가 날 때 까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야 했고 시체가 썩은 냄새가 났어야 했습니다. 전혀 회생이 불가능 할 때 주님이 등장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죽은자를 살리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영이 죽은 우리를 살리러 오셨지 병을 고쳐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죽었던 영을 살리러 오셨기 때문에 창조의 세계를 열어 가시는 무대에 주님은 등장하십니다. 2장 8절~ 15절까지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우리가 주로 받았으니 너희는 그 안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도 이로 인하여 충만하여지라는 것입니다. 충만의 내용은 마음의 할례를 입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육적 할례를 입어서 언약 백성이라는 표징을 갖고 있지만 만물보다 부패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들을 높인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할례를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되어 장사지내면 주님께서 완전히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세계로 일으키심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세계입니다. 충만한 세계가 바울에게 임하니 바울은 “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는데 이전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간증하고 선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계를 만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6절,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았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가?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모든 생활에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할 것을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령의 시대에 와서는 내면의 문제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전히 외적인 행동으로 법을 지켜는 것으로 인정받았던 처럼 성령시대에 와서도 보이는 행위로 인정받으려는 것에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하십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하는데 구약시대에는 먹고 마시는 음식규정과 제도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월삭을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모든 것이 앞으로 될 그림자이고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쓰시고 이 땅에 오신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실체입니다.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탄생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할 수 있도록 인도해 가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여 교회가 탄생되게 하시고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시는 이 뜻을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이 몸의 그림자가 구약의 모든 절기를 지키는 항목으로 실체가 오기까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체로 오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오셔서 각 심령에 역사하여 주시는데 율법인 그림자를 왜 붙들고 있는가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교회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날을 지킵니다. 우리의 주일은 구약의 토요일이 아니고 실체가 오신 안식일 이후 주의 첫날 즉 팔 일째 주님이 부활 하신 날입니다. 주의 첫 날을 지키면서 부활하신 영과 함께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우리가 부활의 주님으로 시작하는 이날이 주님의 날인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그 영을 우리 마음에 받은 자들은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이 새 창조이고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기 위해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부활의 영을 받아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들어가기 원해서 초대 교회는 주님의 첫날에 모여 떡을 떼고 교재하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구약의 율법 따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로 옛 창조가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새 창조에 속한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첫 날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 구원을 받은 주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율법으로 양육을 받아오다가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에 오면 더 이상은 율법에 종노릇 하지 않고 율법의 완성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시면 하나님을 아신바 되고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다시 들어가 종노릇 하지 않는데 성령을 받아 시작 된 골로새교회에 의문의 증서를 가져와서 안식일도 지키고 할례도 행해야하고 절기도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지켜도 그 수고가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오늘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변화되지 않은 옛 창조에 속한 그대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영적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으면 헛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실체는 예수님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그림자입니다.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립자입니다. 그런데 이 썩어질 양식은 먹으면 먹을수록 죽습니다. 지구상의 물도 마시면 갈증이 해소 될 것 같지만 잠깐이고 여전히 목마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실체이고 이것이 양식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지고 다니면서 세상 것을 구했지만 그 영혼에 만족함이 없었습니다. 주님과 만나 말씀으로 말미암아 물동이를 내려놓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안식일을 범하면 죽인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림자였습니다. 지금은 실체가 오셔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신데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되면 양심이 부끄러워 모든 것을 가리게 되는데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나의 타락한 본성을 덮어 주시고 실체의 삶을 살아가다 보니 그리스도로 옷을 입게 되면 세상조류를 좇지 않고 치우치지 않습니다. 주님과 연합하면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로 이루어지면 주님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는 안식이 열립니다. 없으면 금식하고 그것도 없으면 순교하면 된다는 믿음의 결단이 생깁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완성이고 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영으로 오시므로 365일이 안식입니다. 월삭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으로 내 안의 어두움이 떠나가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절기는 굉장한 기쁨과 만족인데 주님이 우리의 호흡이시고 우리의 만유로 오셔서 그 분으로 인해 우리의 심령이 기쁨과 누림이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함을 따라가 내가 계획하고 염려하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이끄시는 대로 열어 주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것이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직 실제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만유가 되시는 것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주님 외에는 다 없어질 것이고 지나갈 옛 창조에 속한 것이고 수많은 이생들이 그림자에 속고 속이고 사는 것입니다. 헛된 것에 온 인생을 투자하면서 목매고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형상을 갖고 말씀을 이루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의식이나 경험 교리나 지식은 실체를 받기원해서는 다 잊어버려야합니다. 오직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만 갖고 있어야합니다. 18절, 골로새교회에 이단 사상이 들어온 것처럼 경험과 듣고 본 것들로 경건을 포장해 일부러 겸손한 척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 앞에 거룩한 형상을 입을 수 있는 상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가 이단이라 할 것없이 우리 가운데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도록 변질시키고 있는 우리의 속성이 이단인 것을 잡아내야합니다. 내 안의 이단성을 말씀으로 갈라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풍성과 은혜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 상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타락한 육신의 본성으로는 성경의 계시를 버리고 자기 주관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보다 자신이 경험하고 본 것을 의지합니다.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한 것이 심령들 가운데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로 끊어짐이 없으면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로 끊어졌다는 것은 말씀으로 넘어 갔다는 것입니다. 옛 창조가 아니라 새 창조로 넘어 갔다는 뜻입니다. 타락한 본성으로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것에 하늘의 은사를 주면 이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로부터 우리를 빼앗으려는 이단사상에 대해 우리의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임하려면 근본 된 토지를 갈아 엎어야하는데 말씀 앞에 진정성 있는 회개를 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자기 소견대로 가다보니 누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몸과 머리입니다. 머리를 떠나 자의적으로 살아 가다보니 머리에 붙어있는 몸이 머리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상인데 이 누림이 없어서 교회로부터 받을 상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 성령으로 시작한 골로새 성도들에게 그림자가 들어와 실제를 놓고 그림자에 관심을 갖게 하여 올무를 놓은 것이 이단사상이고 이렇게 되어 혼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질 안에 들어가면 답은 하나 생명이고 빛입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계시를 열어 주시는데 말씀을 받으면 심령 속에 죄가 드러나 십자가로 가져가 재물로 삼아야함으로 싫어하고 원하는 것은 신령한 체험을 해서 영광을 받고 이름 내기를 원해 변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지만 믿는자를 보겠느냐 하시는 하나님의 한탄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을 원하다보니 광명한 천사를 가장한 사단의 역사가 시작 되는데 거짓 영에 사로잡혀 허황된 꿈을 꿉니다. 진정성 있는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리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지으신 분의 은혜를 입고 살아야하는데 막혀 보이지 않아 나를 왜 지으셨는지? 왜 이 환경에 넣으셨는지? 주님의 뜻을 전혀 분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깔끔하게 된 사람은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래서 오전 길에는 날마다 내 뜻을 구하다가 예수님이 오시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 묻게 됩니다. 이때 말씀을 받으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 없이 말씀을 받으면 지식이 되어 교만해집니다. 우리의 가는 길은 말씀으로 우리를 지으셨는데 타락하여 말씀에서 떠난 우리를 다시 말씀으로 찾아 오셔서 새 창조함을 입어 말씀의 나라 천국 가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거짓 된 영에 스스로 속아 자기를 높이려하는 이단사상이 우리 안에 있어서 자기주장을 하고 근본 말씀을 훼방하고 흐름을 훼방하는 원수 된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19절, 이단사상의 특징 중 하나는 거짓 된 영인데 머리를 그리스도로 붙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늘 머리를 자기를 둔다는 것입니다. 이단은 자기 소견이 중요하고 말씀이 중요하지 않고 자기 방식이 중요하여 성령이 중요하지 않고 늘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절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들지 않습니다. 자기가 머리 되려는 교만을 꺾어버리고 지체들과 연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따르기보다 지혜로운 모습으로 천사숭배하고 싶은 것이 우리 안에 이단사상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그곳이 생명이고 그곳이 영생인데 주님 가신 그 길은 너무 초라하여 스스로 자신을 높여 자기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주님 가신 길이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단입니다. 스스로 뛰어나 보이기를 원하고 나를 통해서 주님이 역사하시고 영광 받으시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힘입어 내 이름을 내고 내 원대로 펼치면서 인생을 살아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늘 자기를 높이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스스로 꾸며낸 겸손으로 은혜를 입은 자처럼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받은 자처럼 꾸며서 일부러 겸손한 척합니다. 우리가 머리를 붙잡을 때에 비로소 마디나 힘줄이 공급을 받게 되고 내 안에서 하나님이 자라시게 하는 생명나무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성장이 됩니다. 마디는 몸에 공급을 위한 것이고 힘줄은 몸의 지체를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공동체 지체는 마디이고 힘줄입니다. 개별적으로는 하나님이 절대로 역사 하실 수 없습니다. 머리이신 하나님의 붙은 지체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이나 공동체 안에서 내 스스로를 높이면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검증해 보고 그림자 대신에 주님의 몸을 붙들고 적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보아야합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소견도 그림자일 뿐이고 나의 생활방식도 그림자이고 자존심도 그림자입니다. 내가 머리되고자 한다면 이단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쳐서 교만을 꺾어야합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나의 타락한 것들이 처리되고 사망을 깨트리고 어둠을 이기신 부활의 생명을 말씀으로 주셨으니 한 주간을 부활의 생명으로 경작하여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말씀은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움직입니다.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 말씀과 연합하는 세계가 열립니다. 말씀 따라 선택하면서 순종하고 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의 인생을 말씀이 주관 하실 수 있도록 말씀 앞에 무릎 꿇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아들의 영이 임하여 상속자가 되어 하늘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면 교회의 모든 일에 방관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아직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가면 교회가 내 교회이고 지체가 내 몸인 것입니다. 지체의 고난과 아픔이 나의 고난과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돕고 섬기며 주님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가 되고 한 주간을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는데 붙여주신 심령과 삶을 통해 잘 경작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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