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헤롯과 나의 옥문은 무엇입니까?
성령과 은혜가 충만하여 초대교회가 부흥이 되고 표적과 기사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왕성한 가운데에 핍박이 오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흩어내시는데 예루살렘에 책임자로 있던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고 오늘 본문에서는 기둥으로 있던 베드로가 헤롯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여 믿음의 길 간다 할지라도 또 믿음의 직분자라 할지라도 세상을 상징하는 헤롯 즉 가치관이나 세상의 권세나 물권이나 건강이나 이런 육적인 것에 사로잡혀서 옥에 갇힐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쇠사슬에 묶여 너무나 견고한 헤롯의 옥에 갇혔으나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기도중에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들 또한 세상의 모든 문이 막혀 도저히 소생할 가능성이 없을 때에 하늘 문이 열리는 과정인 것을 알아 말씀을 듣는 중에 사로잡혀 있는 감옥에서 옥문을 열고 나올 수 있는 기도의 영이 열리기를 원하고 해결 받는 시간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옥에 갇혀있는 우리의 심령은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스데반이 죽는 것을 경험 했고 야고보가 죽는 것도 봤으며 이제는 자기가 죽을 것을 예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안에 주의 영이 임하니까 세상도 사망도 그 어떤 것도 베드로의 영혼을 사로잡지 못하고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육으로 생각했다면 사형집행을 앞두고 두렵고 떨리고 염려하고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죽을지라도 영혼이 천국에 입성한다는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일 죽을지라도 오늘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려운 상황이 있을 때에 베드로처럼 내일 죽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할지라도 홀연히 옷 한 벌 벗듯이 육을 벗고 주의 품에 입성할 수 있는 영혼이 소생한자가 되어있습니까? 우리들의 심령이 쇠사슬에 묶여 옥문에 갇혀있다면 오늘 홀연히 주의 사자가 말씀을 통하여서 빛으로 내 심령가운데 일어나 주님께서 나의 옆구리를 치면서 깨우는 역사가 일어나서 영이 소생케 되는 축복이 일어나기를 원하여 주님을 따라서 쇠사슬이 우리 손에서 벗겨지는 역사, 우리 심령에서 벗겨지는 역사, 나의 모든 근심과 염려에서 내려놓는 역사가 우리들의 심령가운데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언제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까?
간절히 기도할 때 열렸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말미암아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었고 야곱의 기도로 말미암아 사면초과 유숙하는 곳에서 하늘 문이 열려 브니엘의 역사가 일어났으며 엘리야가 기도 할때에 하늘문이 닫히기도 열리기도 하는 역사가 있었으며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할때에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리는 역사 또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을 알아서 우리들의 무릎의 기도가 구원의 역사를 이뤄내는 큰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도만 한다고 해서 옥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순종함이 함께 있을때에 옥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띠를 띠고 신을 들메고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즉 하나님의 기적은 언제 체험하느냐 하면 말씀이 있으매 그대로 믿고 순종할 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옥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옥문은 무엇입니까?
“옥문을 열어주세요”라고 기도할때 옥문을 열어 주시기 위하여 순종 할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그대로 순종하고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경험과 자기의 주관과 자기가 알고 있는 기준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그 다음단계 이 말씀의 생명의 능력, 전능자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고 가게 됩니다. 안다는 기준에 갇혀 또 다른 옥문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문밖에 손발을 씻는 여섯 물 항아리의 물을 떠다가 아구까지 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순종 할때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데 이전보다 포도주가 훨씬 맛이 좋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정말 옥문이 열리기를 원합니까? 눌려있는 죄짐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생존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합니까? 질병의 사슬에서 풀려나기를 원합니까?
기도하시고 순종하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것(옥문)과 상관없이 자유할 수 있는 안식의 영
사로잡혀 있고 캄캄하고 쇠사슬에 묶여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이 절박한 위기속에서 띠를 띠고 신을 벗고 극박한 상황가운데 겉옷을 벗어 놓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니까 안식을 누렸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이 세상 정세에 어떻게 살아야 될건지, 어떻게 해결해야 될건지, 알게 모르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짐을 지고 염려한다고 해서 내가 그 걸음을 인도할 수 없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아래 있으니 ‘어찌하여 어떻게해야’라는 주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떠나가기를 원하고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겉옷을 벗고 띠를 띠고 신을 벗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이 안식의 영이 우리들의 심령가운에 말씀을 통하여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호수아를 불러 쓰실때도, 모세를 불러 쓰실때도 수없이 주의 사람을 부를때에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셨던 것처럼 내가 너무 왕성해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내려놓기 원하시고 나는 연약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내려놓게 하시고 그래서 신을 벗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앞에 자기권을 쓰지 아니하고 죽고 사는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겨 이제는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주의 영이 임하여 쇠사슬에 묶여 있어도 옥문에 겹겹이 쌓여 있어도 세상것과 상관없이 홀연히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안식의 세계를 부활의 생명가운데 만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한주간 기도에 힘쓰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사순절 주께서 걸어가신 그 발자취를 따라 경건의 삶을 살면서 부활의 영이 오실수 있도록 기도로 그 길을 여는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 사순절 기도 중에 우리들의 옥문이 열려서 주님의 임재가운데 자유함을 누릴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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