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울이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본문에 바울을 말하기를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하는데 바울도 아니고 사울도 아닌 경계선에 서있는 때를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사울을 낳고 그의 이름을 지어줄때는 히브리식 이름으로 ‘큰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처럼 큰 자가 되어 세상의 통치권을 가지고 굴림하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나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의 싸움에서 그렇게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애써왔던 인생길에서 자기는 정말 보잘것 없는 미천한, 창조주앞에 티끌만도 못한 피조물이란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존재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 안에 임하신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는 인생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가 로마인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사명을 받고 로마식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자’라는 바울로 개명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사울로 등장했으나 이제 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계시를 좇아 선교여행을 떠나 오직 전도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는데 낮은자로서 시작을 합니다.
이렇게 출발한 선교여행에서 만난 사람이 총독 서기오 바울입니다. 이 총독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 예수의 소식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 총독의 지위는 왕이 특정한 지역에 그 지방의 통치권을 부여해서 임명한 통치자입니다. 할당된 지역에 한해서는 왕의 권한과 치리권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황제의 특사나 행정상 지방총독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때로는 법을 집행하고 사형도 판결할 수 있는 권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이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이 회심을 하게 되니까 아프리카 전역에 복음이 전해지듯이 이 총독 한사람만 복음이 들어가면 그 집안은 물론이고 그가 통치하는 관할지역에 많은 식민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도를 하는 과정가운데에 총독의 수행원인 엘루마라는 마술사 거짓선지자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적 행하는 것을 볼 때 누가봐도 거짓선지자인줄 모르고 속을 수 밖에 없었는데 누구에게 분별이 되고 잡히느냐 하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아니 드러날 것이 없이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총독이 참선지자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받고 회심을 하여 창조주 앞에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면 자기가 거짓선지자라는 것이 들키게 되기 때문에 총독이 말씀 듣는 것을 대적하며 반대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음의 길 가면서 내 안의 반대자도 만나게 되지만은 한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도 환경적으로 얼마나 많은 방해세력을 만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방해세력을 성령의 충만한 바울이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총독 서기오 바울을 개종하는데 방해하고 있는 엘루마를 바울이 주목하여 봅니다.
우리는 세상적으로 경우이치를 가져오고 너무 합당한 말을 가지고 나오면 분별을 못해서 속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여 성령에 충만하면 우리안에서 영적인 모든 것들이 분별이 되고 또 상대방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것도 분별이 되는 능력이 주어질줄 믿습니다.
말씀의 기초가 없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의 발상과 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지고 기도의 응답으로 잡고 가기 때문에 거짓술객이 될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기도하면서 영적분별하려면 말씀과 기도를 겸비하여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때에 영분별하는 능력을 위로부터 받게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서 악한영의 귀계를 볼수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에베소서 16절에 악한자와 싸워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악한자는 누구입니까?
내 심령가운데 천국이 되지 못하도록 말씀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누려야 될 평강과 안식의 세계가 열려지지 아니하도록 불안과 초조와 염려와 걱정과 불신 이런 모든 것들로 영혼의 소생함을 막고 있는데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니까 주목하여 보지도 않을 뿐더러 내 생각을 타고 들어온 염려의 영과 같이 걱정하고 눌리며 불신하게 되는데 본문의 바울은 성령이 충만하여 속지 아니하고 분별하여 대적자를 쳐내는 대적하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악한영이 내 안에 들어와 염려하게 하고 불신을 주고 불순종하게 하고 이간질하고 참소하게 하고 불평과 원망으로 날마다 헤어나오지 못하는 아픔을 가지고 눈물로 살아가면서도 이것이 난 줄 알고 내 인생인줄만 알았지 악한영이 들어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원통함으로 눈물을 흘릴만정 이것을 예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대적하는 기도 한번을 못해봤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권세를 주셔서 그 능력을 행하여 이기는자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너희를 피하리라’ 지금 내가 세상의 어떠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대적자를 주목하여 보면서 분별하여 쳐내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내안에서 비방하고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올때 ‘주여’ 이 한마디만 해도 악한 영들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대적자를 쳐내는 대적하는 기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괴롭히고 공격하는 악한세력들을 결박하고 파괴하고 초토화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사용하는 우리들이 되어야지만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게 될줄 믿습니다.
더 이상은 우리가 악한자의 그릇이 되지 아니하길 원합니다.
영혼을 살리는 인도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기를 원하셔서 예수님의 생명을 속전으로 드리면서까지 사신 귀한 존재가 우리들인데 더 이상은 마귀에게 결박당하여 두려워 떨면서 종노릇하는 자 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당당하게 싸워 이겨나가시기를 원합니다.
모든 궤계와 악행가운데 역사하는 영은 가만히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 무심결에 보고 듣는 것에서 부지중에 우리들의 심령가운데 들어와 마음에서 분유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통하여서 들어 온것이 점점 생각을 타고 깊이 들어가 결론을 내고 옥에 갇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각과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생각도 하늘의 지혜가 되기를 원하고 부지중에 들어온 생각 속에 나의 모든 기준이 되고 있는 이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도 중에 분별하기를 원합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늘에 속한 것인지 땅에 속한 것인지, 성령에 속한 것인지 악한영에 속한것인지 분별하여 말하고 행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악행이 무엇입니까? 어두운 영인데 특성이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있어서 되어져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 평안함을 끼치는 것이 주의 능력인데 자꾸 환경을 따지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이 모든 것이 구원의 길을 막고 있는 엘루마와 같은 악한영의 궤계인것을 알아 속지 않고 분별하여 대적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평안을 받는 한주간이 되어 승리하는 우리들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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