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 | 여수룬 | 2011-04-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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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3;13-23
바나바 - 예루살렘교회에서 흩어진 자들을 통하여 안디옥교회가 세워짐으로 인해 요셉이라 하는 구브로사람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합니다. 바나바의 파송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꾼이 많아 혹 없어서 아무나 파송한것은 아니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에는 여러 모양의 심령이 있었음을 사도행전13;1절을 통해서도 알수 있습니다. . 주를 만나 요셉이 권위자 안위하는자 라하는 바나바가된 그는 자기 소유를 팔아 공동체를 위하여 다 내어놓고 형제들을 권면하고 안위하며 어떤 심령이든 품을수있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가 되었습니다.(행4;36-37,11;23-24) 그가 안디옥에 올때에는 많은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나 였다면 어떠 했을까 싶어요. 바나바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광을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이 모든것이 아버지가 하신것임을 알기에 또 받은 것이 있어도 자기로서 깊고 심오한 주의 계시를 전하기에 어눌함과 부족함을 알기에 주님이 쓰시려는 사울을 찾아 다소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와서 강대상을 맡깁니다. 나같으면 그자리를 내어 놓을수있었을까요? 나는 일인자의 자리를 좋아 합니다. 주도 하는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 자리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도 바나바와 같이 양보할수 없을 것같습니다.. 이전 같으면 자칭 여리고 왕이 되어 누구에게도 발설 할수 없을 텐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벗을 수록 위에것을 입을수 있는 능력이 오기에 공개적으로 내안의 수치를 들어 냅니다.이 말씀이니까 눈먼 나도 보이고 알량한 자존심 상관없이 고백할수 있네요. 바나바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않았습니다. 다만 영혼살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바울이 자기보다 더 나은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받을 것을 알고 바울에게 모든것을 양보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관심은? 사울이 온후 둘이 합심하여 안디옥교회를 섬겼습니다.흩어진 자들의 무리가 모여 더 큰 무리가 되어 바울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심령들 삶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기 시작 했습니다.(11;26) 바울 - 길르기아 다소출신인 바울의 본명은 사울이 였습니다. 가진것과 배운것으로 열심이 특심되어 여호와를 섬겨왔던 사울은 공교롭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꼬꾸라 졌습니다. 자기 가 옳다고 여겼던 일을 더이상 행할수 없었습니다.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 였습니다. 주를 만남으로 인하여 생명의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길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결코 만만하고 쉬운길은 아닙니다. 주를 만난것과 회심하여 생명을 얻은것에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사도들도 자기를 경계하였습니다. 내게있는데 인정 받지 못하면 그보다 괴롭고 힘든것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받은것이 확실하기에 요동치 않고 환경에 순응하여 주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오한 주의 계시를 받을수 있었고 훗날 사역하는 가운데 이제는 자기권을 쓰지 아니하고 육은 바울 이지만 그안에 담긴것이 그리스도이기에 오직 성령으로 모든것을 행하게된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가진것도 배운것도 없고 열심도 없으면서 인정받지 못해 발버둥치고 죽기 싫어 하는 나의 정체르르 봅니다.바울은 환경이나 사람에게 영향받지 않고 총독에게 총애를 받는 사람 일지라도 진리를 가로막는 것을 보고 바예수안에 거짓된 정체를 밝혀 대적하는것을 보면서 좋은것이 좋은것이라고 적당하게 타협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나바를 좋아 합니다. 사울을 바울되게 한 사람이 니까! ! 바울을 좋아 합니다. 위대하니까! 일인자니까!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나는 바예수라하는 엘루마박수에 불과합니다. 주와 상관없이 자기 생계를 위하여 이익을 위하여 사람의 환심을 얻기위해 거짓증거하며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기보다는 사람의 비유를 맞추기 좋아하던 나이니까 .바울이 바예수안에 거짓 선지자를 잡아 낼수있었던것은 성령이 충만하여 주의 영으로 그를 주목하여 볼때에 그안에 정체를 잡아내고 갈라주고 쪼개줄수 있었던 것처럼 나 또한 내안에서 영과 육이 확실하게 갈라지길 원합나다. 요셉이 바나바되니까, 사울이 바울이되니까,자기만 생명을 얻고 구원받는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아들의 씨가 탄생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구원의 역사가 미칩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자리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자리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내 경험과 여기 저기에서 주어 담은것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깔고 교만하고 높아져 본문에 요한처럼 자기길을 열고 가는 어리석은자가 되지않기를 원하며 주의 길을 가로 막는 자리에서 돌이켜 내가 가지고 있던 기준에서 돌이켜 악한영이 내게서 떠나가기를 원합니다. 떠날찌어다!스스로 나를 높은자리에 올려놓고있는 교만은 떠날찌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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