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에 합한 그릇이 되기 원합니다. | 홍양학 | 2011-04-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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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16-23 자기 의와 열심이였던 바울이 꼬꾸라지므로 주님의 마음에 합한 그릇이 되어 생명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간것은 율법을 배우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빛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바울이 여러 모양이 된것은 사람을 얻기 위하여 율법있는 자로 회당에 들어가심을 보게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듯이 동일한 영의 역사이기에 심령에 따라 필요를 따라 양식을 공급하는 생명의 역사가 바울에게도 일어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그 후손을 통하여 애굽에서 나와 이제 가나안에 이르러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바로 우리안에 있는 7족속을 쫓아내는 그리하여 우리의 심령에 먼저 터잡고 있는 본성에서 천품, 그리고 배우고 알았다는 성격가운데있는 7족속을 다 몰아내어서 우리의 심령가운데 주님이 임하시는 것이 이새의 아들 마음에 합한자 다윗을 통하여 구원 주 예수를 낳는 하나님께서 이루고자하는 뜻이라고 전합니다. 구약을 이렇게 나열한것은 그들이 구약에 너무 뿌리 밖혀 있기때입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의식이 있고 옛법이 있고 그리하여 그들은 선생이 되고 박사가 된 사람들입니다. 아는 것에 가득 채워져있는 그들에게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 모든 것이 있다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다윗을 통하여 낳을 뱀 대갈을 깨뜨릴 후손인 예수가 없다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다윗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요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예수를 탄생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바로 나를 통하여 예수를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사람 다윗은 어떻한 사람일까요? (행13:22) 모든 구약의 주제는 예수를 증거하기 위함이요 예수를 나타내기 위함의 표상이라는 것을 아담의 때로 부터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 우리의 모든 삶 내가 산것 같으나 택한 백성으로서 그 배후의 역사는 주님의 손길이요 나를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는 예수를 낳게 하심의 역사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파라만장한 인생을 통하여 그의 걷사람은 점점 쇠하여 지고 속사람인 솔로몬이 나와 주님이 유할 수 있는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봅니다. 삼하7:14절의 말씀과 같이 사람의 막대기와 인생의 채찍으로 다윗을 다윗이 되게 하여 예수를 낳게 하였듯이 우리에게도 그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예수를 낳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뜻을 위하여 말씀으로 부르시고 기름부으시는 줄 믿습니다. 이새의 집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왕을 기름부으시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을 때 다윗은 그형제들의 수에 차지도 못하고 여전히 양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부모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배재 되었던 다윗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 합니다. 맡는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 하셨는데 다윗에게는 자기의 양들을 사자의 입에서 이리의 발톱에서 목숨걸고 건져내는 충성과 생명을 걸고 생명을 살린 헌신이있었습니다. 오늘날 과연 우리는 충성되고 헌신된 자가 되어 두루다니며 삼킬자를 찾아다니는 사자의 입에서 양들을 건져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워 떨며 방관을 하고 있습니까? 형제가 힘들어 하고 어두움에 잡혀 있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 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어린나이에도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새의 7곱 아들들을 버리셨을까요? 믿음이 없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떠는 형들과 이스라엘 온 군병들 앞에서 다윗은 오직 만군의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여 물매돌로 할례받지 못한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을 통하여 왜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다윗은 자기권을 쓰지 않은 사람이였습니다. 왕으로 세우심을 받아도 원수를 스스로 갚지 않았고 모든 환경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다윗의 만드심가운데 사울을 거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게된 것은 자기의 옳은 소견대로 주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버리고 제사를 수행하게 된 블렛셋과의 전쟁이요... 또한 아멜렉과의 전투에서 진멸하라는 명을 어겨 살찐 송아지와 수양을 두시고 아각을 죽이지 않는 교만함과 순종하지 않으므로 버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말렉은 나의 육이요 아각은 나의 자아이고 자존심이기에 땅의 것은 아무리 선하다 할찌라도 그것은 하나님의원수요 나의원수이기에 당연히 찍어 쪼개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되는것입니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낳으신데 거역하고 완고한 자가 되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더 무서운것은 사울이 하나님의 버리심을 받고 왕권이 떠나고 계시가 떠나고 기름부으심이 없으면서도 이스라엘 왕으로 군림을 40년이나 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흉내내고 모방하는자가 될까 두렵고 떨림으로 깨어 기도하며 순종하는 자가 되어 부활의 생명을 채우는 겸손한 빈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스스로 작게 여기실 때는 쓰셨는데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자기 기념비를 세우는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경고와 거울이 되는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평생 악신이 부리는 자가 되어 다윗을 만드는데 막대기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장인에게 쫓겨다니고 아내미갈의 멸시를 받았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의 고통을 꺾으셨고 시므이의 저주를 받으면서도 여호와께서 행하게 하심으로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원수같은 사울이 죽었을 때도 슬퍼 하셨고 아들 압살롬이 죽었을 때도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찾아 왕의 상에서 함께 먹게 하였으며 모든 재산을 돌려주는 자비를 보여주었습니다. 더나아가 다윗은 열조의 죄와 자기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며 회개하는 왕이였습니다. 이러한 삶이 있었던것은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이자 자신의 원수인 육성을 벗기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환경임을 믿었기에 순응하고 순종한것입니다. 그런한 삶을 통하여 만세전에 택한 마음에 합한 그릇이 이런 것이구나 더 나아가 예수의 생명이 낳은봐 되는 그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길표로 보여 주는것 같습니다. 소망이 없고 시체와 같은 냄새만 나는 무덤에 같힌 우리에게 오늘 날 이 말씀을 통하여 부르시더니 상처로 고생과 원함으로 채워졌던 냄새나는 시체와 같은 빛이 없는 인생이였는데 말씀을 듣다 보니 어느날 빈 무덤이 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원함도 없어지고 상처도 없어지고 아픔도...육성도 없어지는 깨끗한 빈 무덤이 되어집니다. 우리의 중심이 이렇게 말씀을 듣는 중에 육적인 것이 없어지는 변화가 일어난 빈 무덤이 되어 부활의 생명으로 채우는 역사가 일어나는것입니다. 동산지기로 나그네의 모습으로 나타나 어디에도 영향받지 않고 초월한 영으로 보잘것 없는 그릇을 통하여 나타나셔서 우리의 심령에 이 부활의 영을 말씀을 통하여 채워 주시는것입니다. 또한 무덤은 시체를 두는 곳인데 오늘 날 내가 환경에서나 질별에서나 문제에서 나오지 못하고 정복하지 못하고 같혀 있다는 것은 그리하여 불평하고 불만하고 실족하며 불신하므로 냄새를 풍기는 썩어지고 있는 시체가 되어짐은 살아 있은 예수의 생명이 없는 정체임을 보고 애통하며 회개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안에 살아 있는 부활의 생명이 있다면 무덤도 그 앞에 있는 큰돌도 둘둘 감은 세마포도 어찌할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과실라에게도 부활의 생명이 있기에 옥에서도 죽은 시체와 같이 있지 않고 찬양과 기도로 옥문을 열었고 베드로도 죽음을 통과하므로 평안히 잠을 자는 산 믿음이 있으므로 감옥을 정복하였으니 옥안이나 옥밖이나 여전하기에 감옥이 그들에게는 필요없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살아 있으나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는 세상의 어떻한 것도 초월한 산 순교 산 믿음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예수를 낳은 자의 생명이 아닌가 봅니다. 우리도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합한자가 되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 예수를 낳는 은혜 입은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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