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으라-은혜란 무엇인가 | 구인희 | 2011-05-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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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듣는 무리중에 나타나는 두가지 반응>
하님께서 바울을 세계 제일의 일차 선교사로 보내셔서 이방인가운데 선교를 하러 들어갔는데 디아스포라에 모여 있는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증거할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난 다음에 무리중에 두 가지 반응에 나타난 것에 대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거할때에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인하여서 구원을 받고 변화를 받아 천국에 가는 하나님의 자격을 입어 구원의 반열에 들어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회중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변박하고 비방하는 무리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베드로가 예수를 증거하는 설교를 할때에 두 무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도다’ 라는 베드로의 설교에 자기들은 예수를 죽이지 않았는데 그것을 말로 듣지 않고 말씀으로 받은 사람은 옷을 찢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도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영으로 받았을까요? 정말로 주님은 나의 구원주요 창조주이신데 이땅의 기복에 젖어 세상의 형통함과 육적 형통함을 보고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를 믿고 쫓아 왔다가 내 원대로 되지 아니하고 유대인의 지도자들을 통하여 공회에 잡히게 되고 심문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는 자리까리 오게 되니까 지금까지 쫓아온 것을 억울해하며 이제는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내달라’ 요청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내 안의 바라바> 바라바는 누구입니까? 강도요 절도요 밀란을 일으켰던 자입니다. 그렇다면 강도요 절도란 무엇입니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신데 주인이신 그분의 뜻대로 살지아니하고 내가 주님을 배반하고 대적자가 되어서 사는 것이 강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내 옳은 소견으로 나가면 예수를 죽이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내가 살리고 내안에서 예수가 역사하는 그릇이 되려면 내 소견이 죽은자로 들어가야 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주님을 내 권을 쓰고 내 육성대로 살겠으니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요청하며 날마다 예수를 수없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생활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까 말씀을 들을때 찔림이 되어 통회하고 회개하는 무리가 일어나는 반면 베드로를 모함해서 죽이려는 무리, 오늘 본문에서는 시기하여 변박하고 비방하는 무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우리가 말씀을 들을때 내가 섰던 자리 내가 행하던 일 모든 것들이 찔림이 되어진다면 이것을 말씀으로 받지 아니하고 육으로 받으면 분하고 시기가 가득하여 비방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말씀을 들을때에 찔림이 되어진다면 구원의 역사에 은혜받을 때, 하나님이 나를 만나러 오셨다는 것을 아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생명을 받아 바울과 바나바를 쫓는 무리> 회당에서 바울의 말씀을 듣고 사람이 감동을 받아 다음주에도 말씀하기를 청하며 나가는데 이 시간에 생명을 받은자가 바울과 바나바를 쫓기 위하여 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심령가운데에서도 말씀을 듣고 청할수 있는 영적 파동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청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심령가운데에서도 예수를 청하는 자가 되어 말씀을 사모하고 간청할줄 아는 은혜받은 증거가 우리들 가운데에서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폐회한 후에도 떠나지 않는 무리가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예배가 끝나고 세상에 나가서는 자기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끝났어도 이 말씀이 내 심령가운데 담기워져 내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지 말씀에 묵상하고 순종하고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으라> 이 무리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으라’고 권면을 합니다. 은혜를 아시게 하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는 무엇이냐 하면 다윗에게 허락하셨던 거룩하고 신실하신 미쁜 은사입니다. 미쁜은사는 무엇이냐 하면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죄로 멸망할것에 구원을 받고 천국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이스라엘 되듯이 이 땅에 내 육이 있는 동안 성령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간섭하여 주셔서 내 원대로 내 본성대로 살던것을 꼬꾸라 뜨리시고 일깨우시고 세우셔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지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는 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야곱속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심으셔서 더 이상은 야곱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살아갈 수 있는 나는 죽고 내안의 예수가 사는 부활의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란 예수가 걸어가신 인생의 전 과정을 나도 가게 하시는 것> 예수라는 씨가 보잘것없는 목수였고 나사렛 요셉의 아들이였고 마리아의 아들이였지만은 그안에 있는 영은 세상을 창조하신 신성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 영은 못할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의 영이 생명의 영이 내 안에 심겨지고 자라나서 온갖 채소와 과목이 먹힘이 되어 입맛을 돋구고 영양을 줘서 우리를 살리듯이 우리안에 예수의 신성의 열매가 맺어져 나의 손발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의 헌신이, 나의 말한마디가, 나의 물질이, 나의 기도가, 나의 시간이 그들에게 먹혀 줌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있는 예수의 영을 먹여줘 그들을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구원의 역사가 이르게 하시고 그 안에서 예수가 자랄 수 있게 하시는 것 이것하나 우리에게 소원을 두시고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형통만 주고 잔뜩 넘치리라는 독주만 잔뜩주는 것이 말씀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고 말씀이신 생명이신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본체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통에 오신것도 은혜요 그가 걸어가신 과정도 은혜요 가시면류관 쓰고 핍박받고 침뱉음 당하는것도 은혜요 이 모든 것이 부활의 세계를 이끌어가는 은혜인것을 안다면 얼마든지 고난의 환경이 ‘예’가되는 역사가 일어나서 원망이 끊어질줄 믿습니다. 비방이 끊어질줄 믿습니다. 불평하고 불만하는 것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야곱의 은혜> 야곱이 참으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으나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험악한 인생을 통하여서 이 땅에 의지할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고 내안에 선한것이 없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구원을 강청하는 인생이 되어졌기 때문에 그 안에 주의 영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그 열두지파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세계중앙에 구원의 역사를 일으킬수 있는 위치를 세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은혜> 은혜는 구원의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으면 부르심의 때가 있고 믿음을 세울때가 있고 죄사하여 주실때가 있고 형통케 하실때가 있으며 내가 머무르는 자리에서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날마다 나를 변화시키셔서 온전한 단계까지 이끌어 가시는 과정가운데에 걸림돌되는 모든 것들을 환경으로 빼시는데 다윗은 이것을 일찍히 거룩하고 미쁜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인생채찍과 사람막대기를 통하여서 내 육성을 빼시고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인것을 알아 고난을 감사함으로 감당할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원수로 보지 아니하고 저 그릇이 나 때문에 희생을 당한다는 영생의 해석을 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은혜 입은자 입니다. <은혜받는 비결> 인자가 머리둘곳 즉 하나님이 내 심령안에 와서 거쳐하실수 있도록 내 심령을 비우고 닦는 것입니다.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지지 아니하면 좋은것과 귀한것을 담을수가 없습니다. 이안에 시기 욕심 탐심 탐욕 권력 명예 음란 미움 고집 온갖 더러운것이 다 들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이 내안에 담길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그릇을 비워야 되는데 비울수 있는 능력도 없을뿐더러 비우기 싫은 것이 우리 육입니다. 그러니 이 그릇을 엎으시기 위해서 야곱을 일일이 간섭하고 다루셨던 것처럼 우리의 일생을 일일이 간섭하셔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들을 모두 비우게 하시고 성령의 물로 씻어내어 하나님의 영을 담으십니다. <은혜받지 못하게 하는 것> 은혜받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은 내 자존심 이면체면, 내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왔던 각자의 믿음의 기준입니다. 그러니 원수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존심 이면체면이 원수이고 내가 지금까지 행해왔던 믿음의 기준이 원수인 것입니다. 내가 만들어 논 각본대로 애쓰고 힘써서 만들어낸 믿음의 기준이 원수이고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좀 내려놓을 줄 알아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복하며 갈수있는 역사가 일어나서 우리의 말이 예수의 말이 되고 움직이는 움직임이 헌신, 거룩, 생명, 빛이 되는 은혜받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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