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원인 문제 해결(말씀앞에 기도하는자) | 심미화 | 2011-07-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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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원인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가운데는 수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갈등의 문제는 “견해 차이”라고 할수있습니다.견해차이 때문에 논쟁이 되어지고 갈등이 심해지면 분쟁이오는데 기독교 역사의 뒤안길을 보아도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의 연속입니다.겉으로는 교리문제 인것 같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결국은 주도권 문제인것입니다.우리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안다면,성령의 붙잡힌자가 된다면 우리는 갈등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갈등이 오는 것은 인생의 문제를 나로부터 시작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도 갈등이 왔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 가는 것같지만 1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2차 전도여행때 1차전도여행때 실패했던 마가를 데리고 갈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육정으로 본다면 바나바는 거역할수없는 은혜의 사람입니다. 사도들도 인정하지않는 열두제자속에 속하지도 못했던 바울을 변호하며 사역을 도왔던 동역자이기때문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의 길을 열어주고 바나바는 자신이 취할수 있는 모든 환경임에도 바울을 강단에 세워 말씀을 선포할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러므로 안디옥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고 이런일들이 인간적으로 생각했다면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혜자입니다.바울에게는 고마운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역에는 양보할수 없고 혼합할수 없고 합할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지시함을 따라서 각자 갈등가운데 심히 다투고 나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 바울은 자기속에역사하시는 성령을 누구보다도 체험을 하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줄아는 자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예수님속에 생명이 오셨지만은 본질상 하나님 이시지만 공생에 들어 가기 까지 하나님이 부르시기까지 삼십년을 한가지로 수종드는 삶이였고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나 꼬꾸라지고 더이상은 사도 바울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임하신 예수의 영으로 살아 갈수 있는길이 열렸다고 할지라도 아라비아 삼년 다소에칠년 십년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율법학자가되어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일하던 그가 갑자기 하나님께 사로잡혀 이전의 방식으로 일할수 있음에도 자기의지대로 일을 행한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바울, 바보에서 거짓선지자 바예수를 만나고 대적하는 그의눈을 멀게 하고 루스더라에서 앉은뱅이도 일으키는 기적과 죽을수 밖에 없는 환경가운데 하나님이 살려주시며 많은 심령들을 살려주시고 세워진것에 대하여 인디옥교회에 와서 보고를 합니다 안디옥교회에서도 선교를 보낸그들을 환영하고 선교보고를 받으며 너무 기뻐하며 여호와의 행하신일에 함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영광을 돌리는 곳에는 사단도 함께 역사합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가운데는 항상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도 있는 것입니다.안디옥 교회가 하나가되어 기뻐 뛰며 은혜가 충만하던 때에 잘못된 가르침으로 교회안에 파벌이 생기고 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이것 때 문에 많은 변론이 일어 나고 분쟁이 생기는데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우리앞에도 수없는 위기와 갈등의 삶이 주어집니다.위기를 기회로 역행할수 있는 것은 감정과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아니라 말씀앞에 문제를 해결함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기와 갈등은 각자의 생각과 견해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허황된것을 좆아가는 자에게는 위기가 공허함과 갈등일수 밖에 없지만 다윗은 위기를 주께맡기고 원수를 대적하지 아니하고 기도와 찬양으로 모든위기를 극복하므로 그의 삶이 결국은 예수를 탄생케하는 족보에 올라갑니다 .현재삶이 이전보다 더 악한 환경으로 사방이 우겨쌈을 당한다면 다윗과 바울 같은 고백이 나올수 있을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안식이 없고 평강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디옥교인들은 예수를 영으로 만났습니다.예수를 만남으로 새롭게 성장되어지고 율법 받은자들 보다도 더 상관없이 율법에 완성이신 그분이 각자의 심령가운데 와계시므로 나로서는 율법대로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지킬수없었는데 그분이 오셔서 내육을 정복하시고 그 영이 나를 주장하므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 집니다. 예수의 영이 생명으로 나를 덮어주시므로 그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을수 있는 능력이 온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며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율법으로 의롭다고 할사람이 아무도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회심하고 돌아와 기뻐뛰는모습을 보며 예수와 함께 율법,할례를 첨부하려고 합니다.이것이 혼합주의입니다. 우리가 왜 형상을 지음받지 못하고 평강이없는가? 율법이라는 기준을 내려놓지 못하기때문입니다.이것이 나의 기준의 법이되어서 항상 내 기준의 법에 합당해야만 아멘이되어지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배척하게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왜 갈등이 오는가? 두 번째로 갈등의 원인은? “소유”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롯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에게 은혜입은자 이기에 아브라함을 배신하고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임에도 소유가 많아지자 롯은 자신의 소유를 챙기기 시작합니다.소유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기준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기준입니다.이것 때문에 형제를 통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이것 때문에 선생이 되고 굴림을 하려고합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에 영적 위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내가 옳다고 생각하므로 상대방을 인정하지않고 주장하려는 우리들의 자세.....
세 번째로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수동적이 자세에서 불평하기보다 자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감당하는 역사가 일어나자 갈등은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목자와 양사이에도 끊임없는 갈등은 있습니다. 이 갈등은 멸망할수 밖에없는 감정과 생각과 혼으로 가져 가지말고 말씀앞에 가져 오기를 원합니다.말씀앞에서 해결함을 받아야 합니다.우리생각은 부정한것 밖에 없습니다.이기적이고 욕심으로 가득찬 우리들, 우리의 생각은 타락한 혼이 주장하므로 우리생각을 하나님 자리에 놓을수 없는 것입니다. 갈등의 원인이 무엇입니까?스스로 하나님되고 싶어하는 것 ,사단이 아담을 타락시켜 인류를 저주로 떨어뜨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나님 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갈등 해결 하기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볼수 있어야 합니다.자신의 정체를 보기위해서는 말씀앞에 기도할 때 자신의 정체를 볼수 있는 것입니다. 왜 갈등의 문제가 올때 마다 해결되지 않고 진노를 쌓게 되며 복의 자리로 들어가지 못하고 시험이되는가? 갈등의 문제를 자기생각으로가져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해결함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서 믿음으로 선택해야 갈등이 해결되어집니다.아브라함이 롯(소유)을 내려놓으므로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지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 내안에 기준, 내안의 롯(소유)은 무엇입니까? 나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남에게 지우려 하지는 않습니까? ☞ 내가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주장합니까? ☞행위보다 말씀을 위에 두는자 입니까? 우리가 내려놓는 다는 것이 신령으로는 알지만 진리 가운데 들어가면 취할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속성입니다.그것이 결국은 갈등의 원인이되고 불씨가 되어집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더 이상은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로 살아가는자 내안에 타락한 본성을 비방하고 저주하므로 나의 권을 쓰지 않는 것이 축복임을 안다면 상대방을 비방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앞에 재물이 되어 나를 온전히 불 태우고, 칼로 각을 떠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증표로 주신 율법을, 자신도 메지못하는 멍에를 남에게 지우려 하는 자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안에서 자유함을 얻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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