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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시험하는 내 본성 구인희 2011-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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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가운데 만나는 위기 >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에 돌아와 선교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들을 보고를 할때에 이들을 파송하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기뻐하며 여호와의 행하신 일에 대해 영광을 돌리고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에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기도 오게 됩니다.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렇게 하나가 되어 은혜가 충만함으로 부흥을 일으키고 기뻐뛰었던 안디옥 교회에 위기가 생기는데 파불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당이 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유인 즉 예수님의 말씀을 이방인에게 전할때에 모세의 율법대로 이야기 하면서 율법대로 할례를 받게 할것인지 아니면 할례를 무시한채 이방인의 풍습을 쫓아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줄것인지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변론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남에 예루살렘회의에 교회지도자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모였는데 오늘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에서도 수없는 갈등가운데서 수없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갈등이 왜 오는 것인가?>

첫 번째, 견해차이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이 견해차이 때문에 논쟁이 되어지고 심하게 되면 분열까지 일어나는데 한국사의 교회사를 봐도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의 수없는 교리문제 속에 겉으로는 교리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 같지만 내면의 세계에 들어가보면 주도권행사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면서 몇백개의 교단이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나의 인생의 주권자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주권을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자기의 모든 사상이 꼬꾸라짐을 받아 오직 성령의 붙들림을 받아 가는 것 같지만 1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2차 전도여행때 마가를 데려가느냐 안데려가느냐의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육정으로 본다면 10여년 동안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바울을 바나바가 목회할수 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을 세워 사역을 할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바나바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바울이 바나바를 거역할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사역에서는 영육이 함께 할 수 없고 혼합할수 없기 때문에 주권을 자기로부터 출발하지 아니하고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르기 위하여 크게 다투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 갈등의 뒤에는 소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롯이 하나님을 만나고 거부가 되었던 은혜를 생각한다면 롯이 절대 아브라함을 떠나고 배신할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가운데 소유가 많아지게 되니까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투게 되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신앙의 영적인 생활에 위기가 되어집니다. 나는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눈의 들보는 보지못하고 상대방의 티만 보며 자기 기준의 법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형제를 통과하지 못하고 무릎꿇지 못하며 가르치고 주장하려고만 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네 번째, 내가 하나님되고 싶어서입니다.

왜 사단이 아담을 타락시켜 일류를 저주로 떨어뜨렸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되고 싶었기 때문이듯이 오늘 우리들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주장하고 있는 혼의 영역, 자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쓰기 때문에 자기법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생각과 감정과 내 의지가 앞서며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위에 놓습니다.


<갈등상황에서 해결할수 있는 방법>

불평하는 것보다 수긍적인 자세로 자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감당하는 역사가 일어나면 갈등은 해결되어질줄 믿습니다. 갈등문제가 있다면 타락한 영이 주장하고 있는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져가지 말고 말씀안으로 가져오기를 원합니다. 말씀앞에 가져가 기도함으로 내 정체가 분별이 되어질때에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내 죄를 먼저 볼줄 알게 되고 내가 죽은자로 여길줄 알면 이 갈등은 해결이 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친척을 데려오지 말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지 못하고 조카 롯을 끊어내지 못했었습니다. 자식삼아 위로받으면서 양육했던 롯이 치고 들어와 다투게 되었을때에 롯과 물권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생존문제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겪었던 과정을 통해 자기 죄를 봤기때문입니다. 우리가 겪는 갈등 문제속에 내가 내려놓으면 손해보는 것 같고 내가 먼저 저주면 체면이 상해 망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있어야 될 자리에 롯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을 떠나보내고 나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는 것처럼 내가 저줄때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와 위로하여 주시고 네가 밝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는 약속의 축복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갈등을 믿음으로, 기도로서 해결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왜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인간최대의 위기가 사람이 하나님 되고자 한다는 것인데 가진 것으로 높아지고 가진 것으로 굴림하고자 들며 주장하려 들고 내 의견대로 종 삼고 싶어 하는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이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도 못 지키고 자기 조상들도 지키지 못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지키게 하려고 멍에를 씌어주는 것 이것이 자기가 하나님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의롭고 선하게 여겨 남에게 선하게 살기를 요구합니다. 책망하고 가르킨다고 해서 인성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예수의 영이 생명으로 들어갈때에 변할수 있기에 다만 우리는 예수의 영이 들어가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될줄 믿습니다.

그러니 항상 남을 지배하고 싶고 남보다 내가 낫고 싶고 높고자 하는 이것이 자기 지위를 높여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단의 왕국을 만드는 이 영이 우리에게 흐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되고 싶고 내 이름을 높이고 싶고 내 자리를 높이고 싶은 것입니다.

내 본성을 통하여 내 것대로 주장하고 내 믿음이 옳다고 고집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믿음의 행적이 말씀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까? 내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까?”


< 하나님을 시험하는 유대인이 내가 되지 않도록 >

내가 지금까지 시시때때로 하나님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역사에 들어갔다면 나도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여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게 하는 자리에 더 이상은 들어가지 말고 하나님이 하나님되게 은혜가 은혜될수 있도록 하나님자리에 보좌를 높이 두고 있는 것에서 내려오기를 원합니다. 내게 둘러 진치고 있는 자식이든 남편이든 부인이든 어떤 지체든지 누구나 주님의 뜻을 이뤄가는 동역자들로서 하나님앞에 같이 열고 가는 생명의 동력자요 교제자들이지 누구도 내 아래 내가 하나님 되게끔 그 사람을 내 옆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 되기를 원합니다. 다만 지체가 못해서 씨름하고 있을때 나도 그 길을 건너왔다 그러면 안타까워 애통이 나가고 기도할것 밖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한주간 유대적인 정통에 뿌리내려서 예수까지 못박고 끊임없이 예수의 사역에 장애자가 되고 대적자가 되었던 유대인들처럼 오늘 우리들이 내 본성하나 못 찍어내어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운 법에 쌓여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서 굴림하고 가르키는 속성들이 골고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한주간의 싸움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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