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 이송남 | 2011-07-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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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에게 모세의 율법을 전하면서 율법대로 할례를 해야 한다고 해야하는지 아니면 할례를 무시하고 이방인의 습관를 쫓아 구원의 길을 열어 놓을 것인지에 대하여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을 인하여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것이 첫 번째 예루살렘회의가 된 것입니다. 최초로 예루살렘에서 지도자들이 갈등을 해결하기위하여 모인 것 처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생활가운데 95%는 갈등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생활은 수없는 갈등과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5장의 핵심은 “갈등” 인데 그러면 왜 갈등이 생깁니까? 견해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견해차이가 있으므로 논쟁이 일어나고 논쟁이 심해지면 분렬까지 이른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가운데서 많은 갈등를 격는데 그것은 나의 주권자를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주권자로 여겼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에게도 갈등이 찾아 왔습니다.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자신의 모든 사상이 꼬꾸라짐을 입어서 오직 성령에 부뜰림 받아간 것 같지만 1차전도여행 때 마가를 데려가느냐 않데려가느냐 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바나바를 육으로 본다면 그를 거역할수없는 은인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이 시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부르시기 전 까지 30년 동안 이란 시간에 수종드는 자리에 있었던 것 처럼 바울 속에 임하여서 역사하시는 주의 영을 체험하였고 증거할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그는 기다렸습니다. 사도바울 속에 임하여서 역사하시는 주의 영을 체험하였고 증거할수도 있었고 하나님을 만나서 꼬꾸라짐을 받고 더이상 사도바울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안에 임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살아갈수있는 길이 열렸을 지라도 아라비아에서 3년, 다수에서 7년의 시간동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바나바를 보내주셔서 사역의 길을 열어주시고 자신이 목회할수 있는 기회를 바울에게 줬습니다. 이렇에 안디옥교회가 성장이 되게 하시고 인간으로 생각해보면 바나바는 바울에게 은혜를 베푼 자이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역에는 영육이 함께 할수없고 혼합할수도 없기에 성령의 지시함가운데 각자의 갈등으로 심히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갈등으로 다투는 다툼속에서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1차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교회에 돌아와서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하여 하셨던 모든 일들과 죽을 고비에서 구원해 주셨고 그리고 말씀을 들은 성도들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말할 때 듣는 성도들이 하나가되어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렸는데 그 때에 유대에서 온 어떤 자들을 통하여 위기가 오게 되었고 많은 변론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므로 안디옥교회에서 처방을 내리게 되는데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사도들과 함께 회의를 한 번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않은뱅이도 일으키고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어도 환난도 같이 주시는 것은 내가 했다는 것이 없게 하시고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주신 증표입니다. 노아에게 무지개연약하셨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주셨고 모세에게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표를 주신 것은 감사하라고 주신것이지 나는 구별된 자이고 특권을 가진 선민이라고 하며 교만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유대교인 처럼 내가 받은 직분과 행한 행사가 있으면 하나님께로 받은 선물임에도 그것으로 높임 받고자하는 교만이 있고 율법을 받은 민족이라고 스스로 높아져서 예수님도 죽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안디옥교회가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영으로 만났고 새롭게 성장되어서 율법받은 자보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의 영이 생명으로 오시면 내 뜻, 내 열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영이 나를 주장하시고 정복하니까 율법을 이룰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라고 하셨는데 도저히 원수를 사랑할수가 없지만 그 미워하는 영을 예수의 생명으로 덮으니까 미워하는 영은 없어지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게 하시고 원수도 사랑할수있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다합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다고 알려주십니다. 이방인들이 생명을 얻고 기뻐 뛰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할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의 길에서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는가 ? 율법이란 내 기준을 내려 놓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소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형제들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고 신앙생활중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까요? 닥치는 일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감당하면 갈등은 해결되는 것입니다. 갈등을 멸망할수밖에 없는 생각과 감정을 주장하고 있는 혼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이 갈등문제를 말씀과 기도로 해결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생각은 이기적인 것 밖에 없고 악하고 추한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타락한 영이 주장하고 있는 혼인데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보다 위자리에 놓겠습니까? 왜 갈등이 생기는가 ?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고 싶어서 입니다. 사단이 자기가 하나님 되고 싶어서 타락한 것과 같이 갈등을 해결할려면 내 죄를 볼줄알면 됩니다. 내 정체를 볼려면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봐야하는데 타락하고 저주받은 내 생각과 감정으로 가져가서 해결하러하지 말고 말씀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갈등은 해결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위로로 살아왔던 롯을 끊어냈을 때 하나님이 찾아와 주시고 약속하시는 축복받은 것입니다. 17절 예루살렘에서 이 갈등을 해결하고자 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랜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내 속에 뿌리 박혔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본성도 못버리는 것입니다. 내 본성을 꺽고 말씀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내 본성을 말씀에다가 더하므로 내 심령가운데 천국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와있는데 거기다가 율법을 더하려고 한 것입니다. 은혜가 왔는데 율법을 더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를 높여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영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고 남을 가르치고 싶고 조종하고 싶고 부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못박고 주의 사역을 방해하는 유대인의 속성을 내 안에서 찍어내어 버리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움 부터 골고다에 못박히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날마다 내 자신을 태워 죽이고 각을 떠서 제물로 드리는 환경이 열려질 때 아멘 으로 화답하는 역사가 일어나기 원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 상에 올라 제사드릴 때 손에는 칼과 불씨를 들고 갔듯이 오늘날 우리도 말씀 이 불이 되어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임하고 육성이 태워지고 녹아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기준도 고집도 원망도 다 불에 태워지고 녹아지기 원합니다. 그러면 모든것이 다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어지고 감당할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성령을 주시고 믿음으로 깨끗함을 입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별하지 아니하는 데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구별할수 있겠는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도 우리의 형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쓰고 계실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은 이미 구원이 이방인에게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말씀이 말씀되지 못하게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 보기원하고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게 막고 있는 내 본성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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