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 로마는? 자신? | 김경화 | 2011-11-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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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9:21~29(2011.10.30말씀) 고난도 핍박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빛을 들고 세상 속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외치고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와서 사업 열어주시고,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승진하게 해주시고.... 하는 기도가 결국은 크도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되던 아니 되던 내 믿음이 유익한 쪽으로 환경을 열어주시기에 환경가운데 막힘에 우리는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영혼구원을 위하여 부르셨지 생존문제 해결을 위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행 9:15절에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 여러 곳곳을 다니며 몇 개월씩, 또는 몇 년씩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는 항상 고난과 핍박이 따랐습니다. 빛을 들고 세상으로 가니 세상을 주관하는 어두운 영들이 자기 정체가 들어나게 되고 쫓겨나야 하기에 어두움의 주관자들도 방해하고 대적하는 역사가 일어나서 고통가운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2차전도 때 우상의 도시를 보고 분함을 느꼈던 바울이 오늘 3차전도 에베소에서 바울은 비방하는 무리들에게 도저히 말씀을 전할 수 없게 되자 말씀을 듣고 성령이 임하여 방언하고 예언하는 12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나와서 따로 세워진 것이 두란노서원의 사역으로 부흥역사의 열매가 에베소에서 열려졌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전서 에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 구제문제, 예루살렘에 가야되는 내용, 고린도 교회에 시무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접대하는 문제 등을 서신으로 전해주면서 “내가 에베소에 있을 때 맹수와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고전15:32) 말하고 있습니다. 대적자를 맹수와 같다고 표현했다는 것은 부흥도 많이 됐지만 엄청난 핍박과 환란을 겪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바울은 어디를 가던지, 몇 일을 유하던지, 몇 달을 유하던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경영하여” 말씀처럼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서 결정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사도행전이 점점 진행되어지는 역사를 보면서 “성령을 받았느냐” 그 말씀처럼 성령을 받은 역사가 일어나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움직이는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지길 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예루살렘 가길 원했습니다. 그 이유 첫 번째는 오순절 다락방 이후에 성령을 받고 처음으로 세워진 것이 예루살렘 성전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인의 핍박, 로마정부의 핍박으로 흩어짐을 당하게 되어지고 어려움이 오게 되자 구제를 위해서 가난한 형제 돕는 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길 원했습니다. 두 번째는 할례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온전히 은혜로 넘어왔으면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하는데 성령의 인도함 따라 움직임 속에 가면서도 여전히 유대적인 사상에 젖어서 율법을 가지고 가려하니까 율법도 아니고 은혜도 아닌 혼합이 되어져서 성령의 인도하심가운데 그리스도 몸이 구축되어져야할 지체들이 변질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심령가운데는 더 이상 바울이 아니요 성령의 인도함 속에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는지 몸은 떨어져있어도 그 상황을 알기에 다시 한 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지도자들과 함께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오는 온전히 복음화 되어져야 하는 것에서 바르게 신앙을 적립시켜야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께서 우리를 보실 때 온전히 십자가에 죽은 자가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가는 순종의 그릇이 되어지길 원하시고 쓰시길 원하시는데, 보고, 듣고, 알았다는 것이 율법의 기준이 되어서 머리로는 순종을 하는데 움직이는 것은 내 의의 믿음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함도 아니고 내 의의 온전함도 아니고 말씀위에서 난자, 성령으로 난자의 말씀인데 나는 육체로 따라 난자로 말씀을 받게 되어지니까 생명도 아니고 율법도 아닌 혼합이 되어져서 이상한 변질된 하나님을 빚어내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움에 더 힘들어지는 역사를 했듯이 오늘 우리도 은혜면 은혜 율법이면 율법으로 가야하는데 내기준의 믿음의 법을 가지고 나오면서 이 은혜를 받아들이려 하니까 내 심령이 곤비하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바울이 혼합되어진 예루살렘 교회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이 구축이 되겠는가 탄식 한 것처럼 오늘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여전히 내 의의 길을 열고 있는 우리에게 사도바울이 탄식 한 것처럼 안타까이 생각하시면서 은혜로 넘어오길 원하고 성령의 흐름 속에 순종하길 원하십니다.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왜 바울은 이처럼 위협 가운데서도 로마를 가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로마로 보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는데 땅 끝이 세계 모든 문화의 중심지인 로마인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가는데 목적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 심령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것이요 두 번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확신, 성령이 함께하는 확신은 어떤 심령을 만나도 예수증거하여 지옥 불에서 면하여서 천국으로 갈수 있도록 복음전하지 못하는 불붙는 사모하는 중심이 있는 자는 성령이 임한자요, 구원받은 확증이 있는 자입니다. 하지만 복음전하는 불붙는 마음이 없다면 내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증거로써 말씀 듣는 중에 구원의 확신이 있길 원합니다. 땅 끝 로마는 권력가요, 세력가로써 로마가 정복되어지면 세계가 정복 되어지는 이런 상황가운데 있어지기에 하나님은 바울에게 불붙은 마음을 주셔서 로마에 가서 죽을지언정 복음을 들고 가기를 원했습니다. 세력이 왕성하고 모든 근원이 로마로부터 출발하는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여서 세상 사람들은 황금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사모했지만 바울은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에 가길 원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사마리아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오늘 우리를 이 땅 생존의 세계에 아직 거두어 가시지 않고 생명을 연장 시켜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음 받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인이 되라 하신 것처럼 나를 통하여 구원받을 자가 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그 핍박가운데 에베소에 머물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를 이 땅에 내려놓아 두신 것입니다. 사명을 받은 사람은 일의 성취감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의 움직임 속에 나의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어디로 보내시던 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에베소에서 동으로 가면 예루살렘이고 서로가면 로마인데 바울은 가운데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갔다가 끝인 로마를 가기를 원하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 시작이고 로마는 누구도 올라가기 힘들고, 너무도 완벽한 최고의 영광과 존귀가 허락되어있는 그런 곳인데 그곳이 땅 끝입니다. 우리 심령에 와서 땅 끝은 자기가 스스로 옳다하여 누구말도 듣지 않은 또 세상에서 나로써는 감당 할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자가 우리에게는 땅 끝입니다. 또 내 힘으로 내가 죽지 않고는 통과 할 수 없는 심령이 로마이기도합니다. 성령의 힘입어 하나님 뜻이라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면 움직일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이 세상 것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돈에 대해서도, 위치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었습니다. 바울의 전 일생에 거쳐서 에베소처럼 교회가 부흥한 곳이 없었고 핍박을 당하고 건져낸 심령이기에 바울에게는 생명보다 귀한 심령들 이었지만 성령이 명하시니까 다 두고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 떠나 갈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길 가면서 원하는 것은 바울처럼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이 영광 돌리는 것은 주님 때문에 배도 고파보고, 매도 맞아보고, 욕도 먹어보고, 쳐 죽임을 당해도보고 주님 때문에 흔적이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말다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따질 것 다 따지고 그러하니 주님이 영광 받을 것이 우리 안에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져줘야 누군가 나를 통하여 이긴자가 있고, 내가 양보해야 누군가 나를 통하여 유익을 얻고, 내가 베풀어야 누군가 나를 통하여 은혜 입은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쓰시고 주님이 나타나길 소원하십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장차 받을 영광을 봤기에 이 고난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기도하기는 하늘의 영광을 내세의 영광을 알아 썩어질 것, 허무한 것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영광을 위해서 남은 때를 육체의 소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내 죄는 사하여 졌으니 내 본성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수 있도록 붙잡아 달라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났던 사도바울처럼 우리도 새롭고 산길을 떠나길 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합니까? 영생이 없다면 우리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나밖에 몰랐고, 내 자식밖에 몰랐던 우리들을 말씀으로 구원하시고 이끄셨던 것처럼 사랑을 먼저 우리에게 주시고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져주고, 양보하고 베풀며 살아가길 원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3년을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고린도전서 16:8~9로 말씀은 에베소사역을 위해서 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함으로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와서 사업 열어주시고,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승진하게 해주시고....했던 아데미 신전이 무너지길 원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신이 아니라고 외치니 그들의 경제가 위협 받으니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말씀이 우리 심령가운데 임하게 되어 지면 우리 심령가운데서도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러하니 빛과 어둠, 생명과 사망의 전쟁인 것입니다. 수없이 우리는 영,육간에 갈등을 겪으면서 전쟁을 치루고 가야되는데 왜 사람들은 선동을 하고 소동을 일으키는가? 왜 문제를 삼고, 불평을 하여 원망하여 엎드려 죽은 자가 되어지는가? 결국 내 뜻을 관철시키고 자기유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는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욕심부분이 처리되지 않으면 성전이 지어져 갈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바울처럼 환란이오나 핍박이오나 성령의 도구가 되어 생명 살리는 일에 움직임을 당하는 것이 최고의 하늘의 상인 줄 믿습니다. 아버지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빛나는 별과 같이 이 땅에서 십자가의 흔적이 있어야합니다. 주님 때문에 욕먹고, 매 맞고, 복음 증거 하다가 쳐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 이런 흔적이 하나님 세계에서는 가장 큰 영광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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