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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호자 | 심미화 | 2011-1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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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0장1-6절
주님이 이땅에 오신것은 영광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자 병든자 고통받는자 를 돌아보시고 어둠가운데 있는 영혼을 빛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5장에서 볼수 있듯이 많은무리들이 이전에 맛보지못한 육의 문제가 해결함을 받게되자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칭송하기시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땅에 영광의 주로 오신것이아니라 고난의 종으로 섬김의 종으로 오셨기에 아버지의 영광을 가로채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체험을 경험한 무리들이 주님을 따를때 주님은 무리를 피하여 바다건너 거라사인이라는 마을로 가십니다.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는 가운데 파도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풍랑가운데도 주님은 배밑에서 요동치 않으시고 주무시지만 배에 함께 올랐던 무리들은 원망과 불평으로 주님을 대적합니다. 육은 인성으로 오셨지만 우주를 만드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 예수와 함께 하시므로 주님은 두려워 할 이유가 없으신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세상을 살아 가는 가운데 환경적인 문제가 조금만 닥쳐와도 요동하며 흔들릴수 밖에 없습니다.그러나 예수의 영이 함께 하면 담대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풍랑을 헤치고 간곳은 거라사인이라는 마을 입니다.하나님은 거라사인에 귀신들린 한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주의영이 그곳을 향했지만 어둠의 영은 이미 구원받을 영혼이 있음을 알고 파도와 풍랑으로 주의 길을 가로 막는것입니다.
오늘 본문가운데 에베소라는 도시를 보게 됩니다. 소망이 없는 어둠의 도시였습니다.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자신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줄것이라는 아데미신상을 세우고 우상앞에 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둠가운데 주의 빛이 임하므로 어둠은 물러 가기시작합니다.두란노 서원이 세워지고 12제자를 통하여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이키며 아시아 일곱교회가 세워지는 기초석이 되어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을 체험한 많은 무리들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랐던 것 처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던 우리는 풍요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돈,명예,권력 ,건강....이것이 나를 지켜 줄것이라는 착각속에 땅에소산을 먹기위해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안에 주님외의 것으로 채워진 오물을 수거하러 오셨습니다. 신령한 하늘의 것을 받아야 우리의 영이 소생되어짐에도 위엣것을 맛보지 못한 연고로 여전히 땅만보고가는 우리들을 향해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살아 갈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부르시고 떼어주고 떼어주어도 부족함이없는 영의 세계를 열어주시고자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나의 인생을 주께 맡기면 주님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가운데 에베소 에 소요가 그쳤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요가 일어난 원인은 무엇입니까? 욕심입니다.영이죽은자는 생명을 볼수가없는 것입니다.
창조주를 볼수있는 눈이 가려져 있기에 풍요룰 주는 신이 참신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그것으로 수입을얻고 생계를 유지했던 자들이기에 아데미가 참신이 아니라는 바울을 핍박하며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므로 소요가 일어 날수 밖에 없었습니다.그러나 소요가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에베소의 소요는 바울이 떠날때를 알려주는 신호였습니다. 에베소교회안에서 엄청난 고난과 핍박이 바울을 괴롭혔지만 바울은 사방의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겨쌈을 당하지않는것은 오직 주께서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떤환경가운데서도 오직 복음전하는 일로 생명을 거는 자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땅에 머무는 동안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아니하고 막힘이올때 하나님의 또다른 계획이 있음을알아 주님을 신뢰하고 낙담하지않는 믿음의 소유자가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나를 괴롭히고 있는 데메드리오와 같은 속성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먹고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랐지만 육의 만족보다는 고난받는 주를보며 한사람 두사람 떠날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모든것이 잘되고 형통하여지면 본인의 영광으로 취하면서도 막상 위기가오고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는 고난이오면 주님을 신뢰하지못하고 떠날수 밖에 없는 속물인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소요가 일어날때 함께 대항하는 것이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줄 아는 자 이었습니다.그들을 향하여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은것으로 다된것이 아닙니다.아는것으로 된것이 아닙니다.아는것으로 들은 것으로 이기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영적 싸움인것입니다.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중도 포기가 없습니다.'나'라는 존재가없고 오직 주의 영에 인도함을 따라 움직이는 삶이기에 오직 보내신이의 뜻만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로 헬라로 두루다니며 어디를 가든 오직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며 제자양육에 힘쓰는 삶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바울의 사역을 도와서 함께 주의 일에 힘쓴자들의 거룩한 명단이 기록됩니다.그외에도 뵈뵈,브리스길라와아굴라등등,,,,교회의 보호자가되어 영의 인도함을 쫒아 바울의 사역을 도운자들입니다. 이는 부정한것에서 거룩한것으로 구별되이 기록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가운데도 두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 생명나무과실을 먹을것이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을것이냐 선택은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방치해둔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기에 말씀과 환경으로 끊이없이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며 선택은 본인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요한삼서 서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요한은 서신서를 통해 가이오에게 디오드레베를 조심하라고 권고 합니다. 그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고 악함으로 섬기려 하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고자는 자이며 악한말로 형제를 폄론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디오드레베 와 같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속성은 없습니까? 말씀앞에 나를 비춰 보므로 *디오드레베와같은 으뜸되고자 하는 교만, 흐름을 방해 하는 속성 이 있다면 재단위에 재물로 올려드리기를 원하며 *바울을 도와 동역했던 뵈뵈와 브리스길라 아굴라와 같은 영의 인도 함을 받는 자,보호자 ,성령의 흐름을 쫒아 주의 뜻을 이루는 한주간 되시기를 원하며 이제 돌아 오는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주님께 드릴 영적예물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 보는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주의 영이 우리심령가운데 임하지 않으면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수 도 없습니다. 환경을 통하여 다루시고 사람을 통하여 다룸을 받을때 원망과 불평이 아닌 감사함으로 믿음의 장성한자가되어 넉넉히 이기는 영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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