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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리는 사람되게 하소서 | 노아 | 2011-1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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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20:4
본문은 1절에 “소요가 그치매”로 시작된다. 이 소요는 19장에 기록한 사도바울의 전도로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요였다. 제3차 전도여행에 바울은 다시 에베소에 왔고(행19;1)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2년동안 유하면서 날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고 이로 인해 아시이에 사는 자들은 다 주의 말씀을 듣게 되였다.(행19;7-10)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속에서 바울이 전하는 이 도가 진리이고 생명임을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증거하셨으므로 심령들로 하여금 듣기만 하던데서 주의 이름을 높이고, 믿는 자들로 하여금 헛되고 썩어질 자기 소유를 팔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는 복된 길로 인도하셨다. (19;11-19) 에베소에서도 이같이 소요가 일어 났었다 에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자신의 이익때문에 사람들을 부추겨 에베소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그는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드므로 많은 벌이를 하였다. 하지만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전도로 인하여 많은 아시아의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므로 우상의 은감실을 만들어 팔아 이익을 취하는 그들의 업이 위협을 느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는 아데미를 위한다는 이름하에 에베소에 소요를 일으켰으며 심령들을 혼란시켰다. 더욱 중요한것은 이 소요는 단순한 이익 문제의 소요가 아니라 영젹인 소요이다. 내 안에서 이 소요는 먼저 시작되에 외적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의 놀아운 구원이 에베소에 임했고 살리는 역사가 일어났다. 에베소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보고 경험한 바고 데메드리오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다산과 풍요를 의미하는 아데미가 좋았고 그 이유는 아데미가 생명울 줄수있어어가 아니라 그의 은감실이 였다. 꾝 생명과는 상관없이 돼지만을 좋아하는 거라사인과 같이 말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땅의 황금면류관, 승리의 면류관이 아니라 영원히 쇠하지도 썩지도 아니하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려고 생명의 말씀으로 찾아 오신줄 믿는다. 이 소요가운데서 서기장이라는 사람도 등장하는데 그는 소요를 이으킨 데메드리오와는 달리 이 소요를 그치게 한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내가 있는 곳에서 나는소요를 이르키는 자인지 아니면 이러난 소요를 그치게하는 자인지 생각해본다. 어떤이는 독의 누룩이 되여서 가는곳마다 시기 질투 분쟁 타툼을 이르키고 생명의 길에서 걸림돌되고 가로막는 역사를 하며 또 어떤 심령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처럼 그 부활의 생명을 닮고 가는 곳마다 회복하고 살리는 역사를 이르킨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이 그런 자였다. 소요가 그치매 그는 제자들을 불러 권면하였고 (1절)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떠나 그 지경을 다녀가면서 여러 말로 제지들에게 권하였다.(2절) 바울은 자신의 기준과 의로 충만하여 가는곳마다 사람을 결박하고 핍박하며 옥에 가두고 잔해하여 두렵게 하던 삶속에서 주를 만나 회심하고 돌이켜 품어주고 녹아주며 권면하고 굳개하며 살리는 자가 되였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고 저렇다 라는 것을 알고 말하고 가르치기는 쉬우나 바울이 주를 만나 걸어간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에베소에서의 사역만 봐도 바울이 고린도전서15장32절에 말하기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라하고 또 위의 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하며 고전16장9절에서도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 고 말한다. 이 뿐만 아니다. 바울의 겪은것을 고후11장23-28절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 말한다. 그럼 바울은 무엇때문에 이 모든것을 당하면서도 이 길을 걸었을까? 정말 이렇게 까지 가치있는건가? 바울이 주를 만났다는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일이다. 나도 예수를 만났다. 바울은 어떤 예수를 만났가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는 삶을 살수있었고 주를 만났다는 나는 왜 이 모든것앞에서 싸이고 당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싶고 되는 일이 없는것 같은지…… 바울만 그런것이 아니다.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히11장35-38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3절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에베소에서의 소요든 수리아로 가려는 길어서의 유대인의 해할려는 공모든 모두 부활의 생명을 담은 바울에게 있어서 시험과 고난이 되는것이 아나라 오히려 주의 뜻을 알아가는 계기가 되였고 가는곳마다 아들의 씨가 탄생되였으며 심령들을 굳게하고 살리는 역사가 그를 통해 일어났다. 본문4절에 기록되여 있는 일곱사람 모두가 그 열매이다. 주일 말씀에서 말씀했듯이 모두다 초대교회시대에 기둥들이 되였고 생명의 맥을 이어갔다. 바울과 그들에게도 아픔과 슬픔과 눈물이 있어고 고독과 불안이 초조함이 찾아 왔다.하지만 그들은 이모든것이 이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알았다. 더 나은 본향을 보았고 천국을 알았기에 말이다. 말씀속에서. 걸리고 당하고 어두움을 끼치고 통과 못하고 감당못하며 녹아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실고 마음아프다. 이처럼 알면서도 못하니 말이다. 오늘도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는 아버지께 감사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반복하여 마게도냐로 가게 되는것은 우연과 두려움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다. 마게도냐에는 주를 향한 부르짖음이 있었다. 우리를 도와 달라고 말이다.(행16;9) 아버지는 도와달라고 구원해달라고 부르짖는 마게도냐 심령을 기뻐하셔서 바울의 길을 막으면서까지 그를 마게도냐로 보내셨다. 바울이 가는곳마다 심령을 살릴수 있었던것은 그속에게시고 삶속에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 에수 때문이다. 높아져 으뜸되고 자하는 디오드레베 (요3서 9)가 아니라 정말 심령을 살리는 부활의 생명을 담은 그릇이 되기를 원한다. 주께 부르짖는다. 살고 살리는 자 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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