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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이르니... 심미화 201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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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장17-26절

예루살렘은 주의 임재가 있는 곳이며 제사장이 있고 거룩한 장소로 구별된 영광의 자리입니다.그러나 오늘 본문가운데 바울이 이르렀던 예루살렘은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있는 죽음을 각오하며 가야하는 곳입니다.

17절-“예루살렘에 이르니....”바울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르렀던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세상학문에도 단계가 있듯이 신앙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믿으면 누구나 구원은 받습니다.애굽에있든지, 바벨론에 있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다 언약 백성입니다.예수님이 이땅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 하신곳은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소망이 없는 비천한곳 버려진 땅입니다.흠모할것도소망도 없는 곳입니다.“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고 흑암가운데 수면운행하시므로 뭍이드러나 각종채소와 열매가 맺힘으로 동물들에게 먹힘이 되어 주셨듯이,주님이 이땅에서 행하신일도 흑암가운데 있는자, 병들고 가난한자, 죽은자를 살리시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버림받은 황량한곳에 먹고 배부른 인생으로 부르셨습니다.이땅에 많은 무리들이 바벨탑을 쌓지만 내힘으로 내인생을 살아도 얻은 소득이없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먹고배부른 까닭에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을 꿈꾸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믿음의 수준은 초보적인 딘계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땅의 문제를 해결해주심은 주께로이끌기위한 과정입니다.

많은 무리가운데 주님은 칠십인 제자를 골라내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기위해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야합니다.


사마리아는 이방인과 혼혈된족속으로 더렵혀진 땅입니다.

칠십인제자들이 온전한 능력을 위임받은자 사마리아를 통과 합니다사마리아는 영육이 갈라지는 단계입니다..요단을 갈라내는 육이 수장되어야만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날수 있기때문입니다.우리안에는 누구나 존귀함을 받고자하는 나귀새끼와 같은 속성이 있습니다.

일한 만큼 대우받고 싶어하고 남보다 더 나은자리에서 영광을 취하고자하는 속성이 죽어야만 합니다. 종의 신분으로 오신 주님은 많은 자를 섬기며 살리고자함이 었습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또한 버림받을줄 알아야 합니다.멸시함을 받고 침뱉음을 당하고 뱀의 속성이 소멸되기까지 나의 육을 복종시켜, 여자의 후손으로 살아야 합니다.여자의 후손은 끊임없이 뱀에게 발꿈치를 상하는 인생이지만 결국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것입니다.

나는 뱀의 후손으로살것인가?

여자의 후손으로 살것인가?

내안에 아직도 갈라지지않은 혼돈된 두법에서 영육이 갈라지는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노아는 당대 "믿음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자"이었습니다.그럼에도 그를 통하여 허물이 드러나게 하심은 노아를 통하여 복과저주가 나뉘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과저주를 나뉘게 하심은 불완전한 인자가운데 허물을 보게하시고 허물을 들추는 자에게는 저주허물을 감추는 자에게는 을 주시는 하나님 ,여전히 내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인하여 옳고 그른것을 판단할수 밖에 없는 속성이 말씀가운데 갈아지는 요단이 되기를 원합니다.영육이 갈라지는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죽은만큼 형상이 입혀집니다.형상을 입기위해서는 죽을 환경이 열려집니다.

지난주 말씀에 바울은 "주 예수를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부활의 영을 담기위해서는 죽어야합니다.

육이 수장되어야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죽음은 할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맞지않는 환경 .할수 없는것을 하는 것,나를 부인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바울은 예루살렘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나 소망하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영원한 에덴동산에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의 영광, 빛의 세계를 잃어버렸는데 흑암중에 타락한 본성으로 여자의 후손이 되어야할 영적인 사람이 뱀의 후손으로 타락이 되어서 날마다 종신토록 흙만 파먹는 가시와 엉겅퀴 밖에 낼수 없는 우리안에 더러운 속성들을 예수님은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러가자 말씀하시고 여자의 후손으로 다시 거듭나기를 원하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예루살렘이 육은 영광을 취하고자하는 곳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루살렘에가서 함께 죽자라고 말씀하십니다.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쓰지못하도록 구속시키고 자의가 아닌 타의로 살게하시는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부활이 되었듯이 우리또한 죽어야 부활의영을 담을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길을 우리도 가야하고 죽어야하고 심판받아야합니다.내안에 악이드러나는것이 복입니다.죄가 심판을 받지않고서는 주님이 쓰실그릇이 되지못합니다.

바울이 빛으로임하신 주님을 만난후에 곧 바로 쓰임을 받은 것이아니라 다소에서 7년아리비아3년동안 머물게 하신것은 육이 소멸되고 빈그릇이 되어질때 비로소 쓰임받는 그릇이 되었습니다.주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그릇으로 쓰임받기위해서는 뱀의 속성이 죽어야 합니다.비방,음란,악행,악의가 가득한자 말이 끊어져야 합니다.이렇게 부끄러운 말로는 심령을 살릴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예루살렘에 이르게 하신하나님,바울이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이르자 형제들이 반깁니다.예루살렘에 이르면 내안에 율법( 기준)이 죽고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예루살렘의 경지에 이르렀던 바울의 고백은 “나의 달려갈길은 주예수의 은혜로 내가 받은 사명 이것을 마치려 함에는 내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

예루살렘 믿음의 경지는 어느단계인가?나를 죽은자로 내어놓는 자리 이며 “주님뜻대로 되어지이다”자기부인을 하는 자리까지입니다.하나님이 원하시는 화목제물이 되기를 원할때에 죽을 능력을 덧입혀주십니다.죽은자가 되어야 이길 능력을 주시는 부활의 능력을 받을수 있습니다.죽어야 살려주십니다.죽을것은 없어질것고 망할것이고 멸망의 길로 갈것이지만 이것을 죽은자로 십자가로 가지고가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줄것이며 영원히 쇠하지 아니하고 멸망하지않을 면류관을 주리라 ”약속하신하나님 예루살렘에 이르러 생명이오기까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뜻대로 하옵소서”말씀의 조명을 받아 내안에 악을 볼수 있는 믿음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인생을 준비하는 행장에는 오직 구원의 길밖에 없습니다.핍박과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구원을 위해서 행장을 갖추고 넉넉히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고 생명걸고 복음을 전하던 예루살렘안에는 많은 유대인이 있지만 은혜는 떠나고 율법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 또한 믿음의 길을 가다보면 믿음의 연륜이, 직분이 더하여 지면 교만하여져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주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요한,야고보를 특별히사랑하시고 그들에게 변화산에서 변형되는모세,엘리야,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이들속에 영광의 본체를 보게됩니다.모세와 엘리야 는예수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그럼에도 베드로는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도 갖고싶어하는 실제이신 예수가 오셨음에도 모세와 엘리야를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세제자에게 변형된모습을 보여주심은 모세의 율법,엘리야의 선지자적인 경험 이 모든것을 빼고 오직 예수만 담기를 원함입니다.오늘 우리도 예루살렘에 머물러 예수를 모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예수는 하늘의 사람이고 땅과 혼합하지않습니다.

우리안에도 예수만 있어야 합니다,초막셋을 짓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어 우리는 여전히 갈등속에 살아갑니다.내안에 모세도 떠나고 엘리야도 떠나고 예수만 있으면 물위를 걷고 이땅을 정복할수 있는 능력이 임하여 집니다.우리안에 예수만 임하시면 세상도 감당치 못할 능력이 옵니다.본다고 하는 자 보지 못하게 하시고 보지못해 안타까워 애통하는 자 보게하시는 빛으로 임하신 주를 만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오셨음에도 모셔들이지 아니하고 모세와엘리야를 주와동등한 자리에 혼합시키고 있는 초막셋을 짓기원하는 우리심령가운데 주님만 담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죽기를 각오하고 갔던 주님이 가신 그길을 우리도 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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