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전도관 을 배우자 | 심미화 | 2012-0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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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1장37절-22장8절 20세기 미국의 에이던 토저목사님은 네가지 3단계신앙의 타락에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기계적인 신앙생활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성에 젖어서 처음 주님을 만날때의 감격이 사라지는 것을 말하며 두번째로 습관적인 예배자의생활로 심령은 메마르고 감격도 기대도 사모하는 설레임도 없는 습관적인 예배자의 모습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내안에 정체가 무엇인지도 분별못하는 무미건조한 상태 말씀도 귀에 들려 오지않고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도 않고 어떤권고도 무시해 버리는 자기가원하는대로행하는 습관적인 믿음의 상태 세번쩨로 심령이 부패되어지는 상태를 말하는데 기독교의 변천사를 보아도 부흥에도 소망에도 결의가 된 주를 위한 인생이 아닌 회개도 성령의 능력도 모르고 감각도 없는 그래서 우리심령가운데에 보는것 마다 비판하고 평가만 할 수밖에 없는 이런기계적이고 습관적인 부패한 영적상태 자기는 변하지 않으면서 상대 방이 변하기를 원하는것 네 번째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자기만족의 최대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앞에 인정받고자하는 속성, 교회는 다니고 예배는 드리지만 습관적으로 감동도 감정도 회개도 성령도 능력도 체험하지않은 상태에서 사모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생명과는 전혀상관 없는 죽은 영혼의 상태는 아닌지 우리자신을 점검하는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쫒아 사도가된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만난이후그가받은 사명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지만 자기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늘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들이 구원만 받을수 있다면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그래서 바울은 이방인 전도를 가도 유대인의 회당부터 먼저 찾았습니다, 가는곳마다 유대인들이 박대를 하고 훼방을 하고 모함을 하고 핍박을 합니다. 동족들에게 오해를 받고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그럼에도 바울은 영문으로 수갑을 차고 들어 가면서도 그 천부장에게 마지막 기회를 얻어 자기를 돌로 쳐죽이려고 하는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바울은 자기를 돌 로쳐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포기하지아니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이 이런열심을 가지고 예수를 위해 생명을 거는이유는 ‘한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었고 우리에게 마지막 분부하신것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이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의 명령 이기때문입니다. 오늘 내가 구원을 받아 영생으로 가는 이축복을 받은 복음의 빚진자라면 내가 영혼구원받은 확증이 내안에 있다면 복음을 증거하지아니하고는 견딜수 없는 전도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예수님이 이땅에 오신것은 대속의 재물로 오셨습니다.그러기에 죽음앞에서도 자신을 반대하고 심문하는 자들에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고 입을 열지않았습니다.심판을 받을때도 입을 열지않았고 변명도 하지않았습니다. 생명의 속전이 되지않고는 나를 살릴수 없기에 기꺼이 자신을 대속의 재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그러기에 바울또한 예수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수 있었던 것입니다.바울은 주님이 보내신 신실한 종입니다.복음을 증거하라고 전도인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오직 복음증거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바울의 관심은 오직 복음증거입니다.그럼에도 말씀이 말씀되지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가시와 엉겅퀴는 있습니다. 행21장38절말씀처럼 바울이 오직 복음을 위해 예수를 위해 사는 인생이었음에도 민족의 반역자 성전의 훼방자 모세율법의 파괴자로 오해를 받습니다 주를 만난자와 만나지 못한자의 차이점을 오늘 본문 가운데 볼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 잘알고 잘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육신을 입고오신 주를 보지못하므로 어리석은 자리에 들어가는자가 있는가 하면 보잘것 없는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그 움직임속에 하나님을 본자는 주를 위해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남으로 바울은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주를 위한 인생으로 살아갑니다, 본분22장1절말씀에 보면 둘로 쳐죽임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동족들을 향해 “부형들아....” 라고 부릅니다. 사도바울은 사나죽으나 주를 위하여 생명 거는 각오가 되어진 삶이기에 돌로쳐죽이고 비방하고 훼방하고 갖은모욕을 다하는 자들앞에서도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는 영혼살리는 주님의 심정으로 ‘부형들아’하는 공경하고 섬기는 자리에 처할수 있는 삶이 되어진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그 모욕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마옵서소 저들이 하는 것을 저들이 알니못하나이다. 하는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저들이 나에게 이런 핍박을 하지않아도 유다가 나를 팔아버리지아니하여도 로마군병이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아니하더라도 이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위해 대속물로 온자라는 것을 아는것입니다.,부형들아 ...죽기직전까지 복음의 기회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 예를 다 갖추었던 것 처럼 오늘 우리도 사나죽으나 내 인생이아니라 주를 위한 인생이 되어지는 자되기를 원합니다. 히브리방언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히브리인들 에게 공감대를 얻기위해 히브리 방언으로 말한 결과 그 종용한 분위기를 얻게 됩니다.종용한 분위기를 얻으므로 왜곡된 선민의식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이 자기 기준에 한번 잡혀있으니까 누구말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언약백성이라는 선민의 의식과율법을 받은 사람이라는것과 성전을 신성시 하는데 이것을 훼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울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직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배운 학문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난 예수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들고 나갈때에 과거에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것...내가 예수를 어떻게 만난는가 예수를 만난 이후의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할 때 힘있는 설교가 되어지고 이것이 상대방에게 감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으로 바뀐 삶을 증거하는 살아나는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의 삶에 오직 예수밖에 없었습니다.예수 때문에 매맞고 감옥가고 죽을 고비를 넘겨도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자신이 중요하지 아니하고 예수가 중요한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에수위해 살고 예수가 증거되고 예수가 나타나는 이러한 인생을 살아야합니다.우리또한 에수 믿고 영생얻은자 라면 구원의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믿기전 나의 모습과 예수믿고난 이후의 나의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주를 만난자의 반응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동일한 일을 하는것 같지만 목적이 다릅니다. 동일하게 다메섹으로 가는데 이제는 핍박 아니라 살리러 가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수가성 여인이 수가성에 살때는 그가 살아온 모든 배경이 사람들과 대면하고 어울릴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너무나 조롱받고 비난받는 자로 사람이 두려웠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이후 동일하게 수가성으로들어갑니다.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예수 만났다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잇습니까? 썩어질 육신을 위해 허무한것에 굴복하는자가 되지말고 사나죽으나 주를 위하여 영생얻도록 작정된자 영혼하나를 살리기위해 어떠한 상황에든지 무슨일을 하든지 예수를 위해 바울이 생명걸고 갔던 그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있음은 우리또한 생명걸가치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기계적이고 습관적이고 자기만족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바울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져 복음을 증거하는 주의 사람되어 지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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