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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소욕을 쫒아가는 성령의 사람 구인희 2012-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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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역사하시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을 표현할수 있는 영적존재로 아담을 지어내시지만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창세기 3장에 가죽옷을 입히시면서 양심껏 신앙양심을 회복하고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타락한 죄된 속성대로 살지 말고 너는 그 죄된 속성을 예배의 단에 회개의 제물로 드리고 주님이 오시기를 사모하는 심령으로 예배자가 되게 하시기 원하셔서 양심을 책임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여 믿음으로 자식을 교육했지만 후손들은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이 되어져서 양심을 주신 하나님앞에 양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기대했지만 또한 실패합니다.

거듭 실패함으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주시면서 자기는 죄인이며 곤고한 사람이고 내안에 선한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 주님앞에 예배를 드릴수있는 성막제도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가지 아니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는 믿음생활 잘한다는 의로움으로 가면서 자기를 세우는 타락으로 떨어지게 되어집니다. 이렇게 피족된 족속들이 실패를 하게 되는 가운데에 오늘 바울이 ‘범사에 나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감히 이런 대 단원의 간증을 할수있었던 것은 더 이상은 피조된 족속으로 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환되어졌다는 것입니다.


< 성령으로 채워진자 >

바울이 밀레도섬에서 복음을 전하는 중 밤에 불을 쬐다가 독사에게 손을 물렸으나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바울이 툭툭 털면서 독에 상함을 받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밀레도 섬에 토속인들이 예수를 영접하는 계기가 되어졌습니다.

젊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가지고 주의 일을 하다가 늙은 선지자에 꾀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찢어져 죽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하나님을 믿다가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죽지 않았고 풀무불에 들어갔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사람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훈련을 받는 중인데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종이라면 율법을 준행해야될 그가 피난중에 제단위에 올려진 제사장 외에 먹을권이 없는 진설병을 먹습니다.

안식일에 밀밭사이에 다니면서 밀을 꺾어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인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안식일에 밀밭사이에 밀을 꺾어먹었습니다.

왜 다윗이 율법을 어겼는데 죽지 아니하고 그것을 옳게 여겼을까요? 왜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였을까요? 왜 바울이 독사에 물렸는데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그릇은 다윗이고, 그릇은 다니엘이고, 그릇은 바울이였지만은 그 중심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 모든 것을 지으시고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이라 그릇은 사람이였지만 그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채워진 임재의 그릇으로 움직이니까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이 진설병을 먹는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독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바울속에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그 독사의 독에 쏘이지 아니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 소리는 즉 하나님의 통치안에 권위안에 다스림을 받은 사람은 어디에 가서 무슨일을 해도 해함을 당치 아니하고 상함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을 이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 바울의 성령 사역 >

바울의 일생에는 성령의 나타나심이 그 사역가운데에 날마다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나타나냐면 지혜의 말씀으로, 지식의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이전에 없던 것이 자기안에 역사하심 가운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사랑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율법의 기준을 정해 옳고 그른것을 판단하던 바울이였는데 아닌 사람한테도 아닌 자리에서 고난을 겪는 심령을 바라보니까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희락의 세계가 열려지니까 고난도 함께할 수 있고 아픔도 함께할 수 있는 위로하는자, 안위하는자가 되어졌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이런 속성을 생각지 못했었는데 하늘의 마음에 와있어보니까 성령의 열매들이 맺혀지기 시작하는데 어떠한 경우에도 둘레지 아니하는 화평케 하는자가 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서 어려운 가운데 감옥에 가서도 찬송이 나올 수 있고 기쁨이 되어질 수 있고 그 심령가운데 안식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역사하시니까 즐겁고 기쁜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외적으로 보면 기쁘고 즐거워 할것이 하나도 없고 곤고하고 버림받고 핍박받고 조롱받고 비난받는것 밖에 없는데 그 심령은 그 주변과 상관하지 아니하고 쏘이지도 아니하고 당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영의 흐름가운데 안식을 누릴수있는 열매가 나옵니다.


< 육체의 소욕을 쫒아가는자, 성령의 소욕을 쫒아 가는 자 >

오늘 성전에서 동일하게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지만 육체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는 육체의 사람이 있고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있는데 내가 만약 성령의 임재가운데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그분이 주시는 지혜와 그분이 주시는 지식의 말씀이 내게서 열려지지 아니하고 갈바를 알지못하고 혼돈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믿음이 위에서부터 와 내가 할려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해야될것을 알게 해주시고 병고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주시고 예언과 능력과 영분별, 방언과 통역하는 역사가 성령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역사인데 이런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원하여서‘성령받기를 원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쫓아 육체의 사람으로 육신의 사상으로 예수믿는 것이 아니라 내 심령가운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증거가 내 안에서 확신이 일어날수있도록 성령의 사람되게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할줄 아는 우리들 되기를 원합니다.


< 육체의 소욕을 정복하는 한주 >

바울이 세상도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의 어떠한 핍박과 고난과 환란이 온다 할지라도 그를 요동하지 아니하게 하시고 죽으나 사나 복음을 증거하는 하늘의 메세지 전령자가 되어진 이 믿음의 축복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하였는데 우리들의 심령가운데에 성령을 소멸하는 행위의 자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기를 원해서 눈물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내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인가 성령의 사람인가를 적용해보는 한주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도 육체의 소욕을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금식한다고, 내가 나를 저주한다고 이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지으신 창조의 영이 내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하시면 육체의 소욕을 정복하게 되어질줄로 믿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가운데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누구를 만나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는 신앙양심을 가지고 범사에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고백할수있는...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그 양심을 성령이 지배했다는 것인데 성령의 사람이 되어 이런 고백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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