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송사받는 것이 본질인가? 비본질인가? | 구인희 | 2012-03-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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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독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변호 > 육의 생각으로 보면 갈수록 태산이고 도저히 그 장박을 넘을수 없을 것같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것이 주님의 주권하에 있다는 부활신앙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억울하고 황당한 사건같아도 주님의 뜻을 쫒아 잠잠히 있다 보니까 총독앞에서 변호할수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총독앞에서 변호를 덜미로 하여 예수를 증거하게 되어지는 전도의 환경이 열려졌다. 짧지만 담대하게 조금도 눌리지 아니하고 그들이 고소한 죄목들을 하나하나 변론을 해나가기 시작하는데 아첨과 아부와 과장된 거짓, 술수로 가득찬 더둘로의 변호였다면 바울은 자신도 고백하기를 사람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양심에 꺼리김이 없기 때문에 담대하고 진실하게 눌릴것도 없고 떨것도 없이 당당하게 설수 있었다.
고소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나 들어본적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소요에 따라서 덩달아 고소를 했던 더둘로와 같이 오늘 우리는 살아가면서 작게나 크게 송사를 받는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가운데 미궁에 빠질 송사도 받지만 가장 무서운 송사자는 내 안에 있는 송사자이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들의 심중에 또 다른 나는 날마다 송사하고 재판하느라고 바쁜 법정이 우리안에 있다. 겪어보지도 않았고 들어보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지 아니하고 타락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송사를 받게 하고 지나가면서 들려오는 소리에 심령이 옥에 갇혀 마음의 평강을 잃어버리는 자리에 지금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누구한테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송사받고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내 안에 음부가 되어집니다. 그자와 날마다 재판장에서 옳고 그른것을 송사받다가 스스로가 재판장이 되어 결론을 내고 사로잡혀 있는데, 생각에 한번 사로잡히고 사상에 한번 사로잡히면 그것을 풀고 나오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내안의 송사하는자를 분별할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열려 성령의 능력으로 정복 할줄 아는 우리 되길 원합니다.
내안의 나를 송사하는 것 외에도 이 땅을 살아가면서 참 많은 송사를 받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송사받는 것 외에 첫 번째, 지혜롭지 못한 말과 행동 때문에 송사를 받습니다. 상대방의 반발심을 일으켜서 송사받는 경우가 많지만 자기가 한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언행 때문에 송사를 받게 되어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줄 아는 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두 번째, 사단한테 송사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안에 살면 믿음안에서 주님의 뜻가운데 행해야 되는데 진리안에 살지 못하게 되어지면 그 틈을 타고 사단이 들어와 송사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졌다면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자 로서 하늘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야 될 사명자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살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축복을 받는데 예수를 영접하고 자녀의 권세를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사단의 수종드는자가 되어져 날마다 사단에게 송사를 받는 그래서 환란을 겪는자가 되어집니다. 세 번째, 오늘 본문의 바울과 같이 의를 위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주를 믿기 전에는 받지 않아도 될 핍박과 환란을 바울이 기쁘게 여김은 장차받을 영광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면서 감사하게 받을수 있었던 송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 때문에 예수의 이름 때문에 송사를 받고 핍박을 당합니까? 마지막 기회에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향한 소망이 있다고 증거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소망을 갖고 있습니까? 세상을 향한 소망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세상적인 평판이나 권력앞에서 위축되지 아니하고 굉장히 담대합니다. 오늘 우리도 하늘에 향한 소망 부활신앙이 있는 그릇되기를 원합니다. 부활에 소망을 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둔 사람은 첫 번째, 영혼사랑하는 영이 들어가 있습니다. 진리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영혼구원을 위해 바울처럼 생명을 거는 신앙의 여정이 우리에게도 열립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부활의 신앙을 받은 사람은 내게 붙여진 심령이 믿음으로 온전히 설때까지 헌신하고 섬기고 베풀면서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기다려 줄줄 아는 이것이 영혼의 사랑을 받은 사람인줄 믿습니다. 두 번째, 말씀을 들으면 분별을 할줄 압니다. 우리 육은 더둘로의 속성과 같이 아첨하는 혀를 너무 좋아하지만 아첨은 육적양식을 부어주면서 나를 미혹하고 속이는 자리에 들어가는 영인것을 알기 때문에 거부할줄 압니다. 성령이 조명하신 말씀을 쫒아 육체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듣기 좋고 부드런운 소리 좋아하는 자가 아니라 영적교만한, 내 안의 육체의 욕심을 채우려는 간교한 술수까지도 잡아냅니다. 자기안의 미세한 생각까지도 이 생각이 구원을 원한것인지 내 육적인 소망을 원하는 것인지 말씀의 빛으로 분별해 내는 능력이 영혼의 사람한테는 와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진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세 번째,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죽음, 어떠한 핍박과 고난,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을 수치로 느끼지 아니하고 고난으로 느끼지 아니합니다. 바울 역시 이보다 더 한 고난은 없으나 고난으로 느끼지 아니하는 것은 이미 육은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자기 때문에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이 부활신앙을 담은 사람입니다.
구약은 오실예수에 대해서 예언하신것이 신약에 와서 성취된 것입니다. 오실예수를 예언을 기다리면서 와야 되는데 내가 안식일을 준수했고 정결예식을 치뤘고 제사를 지낸 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옳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이 생명을 취하고 구원의 세계를 얻기 위하여 예수님앞에 나아온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이제 또 바울을 죽이려고 듭니다. 왜 예수님을 논쟁하며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는 자리에 내어놓았습니까? 자기가 지금 처해있는 지위가 안정을 얻기 원해서 예수를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나라에 내가 왕인데 그래서 내 법대로 내 맘대로 살았는데 주님이 왕이라고 하니까 내 터전을 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과 같이 구원과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유대인들이 본질을 떠나 비본질에 집착해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는데도 자기 수준에 맞지 아니하니까 죽인것처럼 오늘 우리도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집착해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잊어버리며 중요하지 않은것에 대해서 많은 씨름을 합니다. 정말 구원과 상관없고 생명과 상관없는 대도 불구하고 옳고 그른것을 따지느라 정욕을 다 쏟습니다. 온힘을 다 기울이고 마음을 다 빼앗깁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성화를 이루는 구원과 관계있는 것인지, 이 말씀을 생명으로 취해 형상으로 지음받는 것인지, 내 이 말을 하면서 씨름하는 것이 상대방의 심령을 살리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인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비본질인 자기 방식 자기 육성을 쓰면서 세상의 옳고 그른것에 너무 많은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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