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 | 구인희 | 2012-03-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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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통하여 등장하는 두 인물을 봅니다. 벨릭스는 권세자이고 자유자입니다. 그런데도 육체의 정욕과 정치적인 야심을 끊어내지 못하여 부정적인 삶을 살아갈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바울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거는 복음전도자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인물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택할것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바라볼때에 너무 놀라는 것은 죄수의 입장에서 내 말한마디면 목숨이 달려있는 권세자 앞에서 어떻게 저렇게 떳떳하고 당당할수 있을까 죽음앞에서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는 바울의 자유함. 우겨쌈을 당하고 두려워 떨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생명걸고 벨릭스가 돌이킬수 있도록 구원의 세계를 열어주는 이 능력과 엄위에 두려워 바울을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에 대해서 듣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창조주에 대해서 알아지는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나는 죄인인것을, 내게 선한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을 초청해서 양육받으면 받을수록 찔림밖에 안되어지나 이 찔림은 구원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입니다. 그런데 나를 스스로 옳다 여기니 이 찔림이 아멘이 되지않아 구원을 잃어버리는 벨릭스의 속성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치는 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의롭고 온전한데 십자가의 도가 자기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반대방향의 길을 열어주니까 거치는 걸림돌이 되어 예수를 죽이는 자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헬라인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고 미련해보였습니다. 헬라철학과 문화로 말미암아 세상의 성전에서 부를 누리고 살던 이들이 이 부를 떠나서 영생의 세계를 이끄는 것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옳다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자기소견과 틀리니까 걸림돌이 되어 오히려 말씀을 대적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유대인이 될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정체를 잡고 나는 부자다 부유하다 하는 헬라인처럼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 미련해 보이고 어리석게 보여서 저버리는 자 될까 두려워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벨릭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증거를 해주고 절제하지 못하는 육체의 정욕을 통해서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무엇이 영생의 축복인지를 절제를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장자임할 심판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가졌지만 그 마음에 지배하고 있는 돈을 내려놓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 때문에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벨릭스와 같이 오늘 우리도 죄가 드러날때마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되는데 회개하기는 커녕 ‘시방은가라 ’다음기회로 넘기는 벨릭스의 속성을 잡아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는 너무나 확실한데 구원과는 상관없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내가 성화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거룩과는 상관없이 생존의 문제 해결받는 것에 치우쳐 있다 그러면 벨릭스와 같은 자리를 떠나서 구원관을 이루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아직도 생존의 문제 때문에 주님을 찾는자 되지 말고 내 죄 때문에 옷을 찢고 회개하는자 되기를 원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애통하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디
바울은 그릇은 하나님이 마음껏 쓰실수 있는 성령의 도구가 되어졌습니다. 이런 바울을 벨릭스는 2년 동안 자기 유익을 위하여 구금을 시켜놨으나 하나님은 구금한 이 기간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2년동안 자기를 죽이려는 매복된 자들로부터 총독의 수하아래 보호막을 치시고 안전지대에서 감옥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2년동안 로마로 이송이되어 아그립바왕에게 심판을 받기까지 감옥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계시가 없이는 쓸수없는 히브리서와 에베소서, 골로새서 엄청난 신약계시가 나와 오늘 우리에게 지침이 되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과 같이 육이 죽은자가 되어 부활의 생명속에 움직이는 그릇이 되어졌다 면 하나님의 손길속에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영의 세계가 열리는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세계를 모르니까 내 수준에서 해석이 안되 ‘왜 안되는지’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들어가서 하나님으로 해석이 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면은 감금시키시고 불러가시는 것도 생존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그 과정가운데 어떠한 환경을 열어주시던 간에 구원의 세계를 이루고 내 죄를 보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줄 믿습니다.
내게 주신 환경이 해석이 되지 않으니까 구원의 세계를 잃어버리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거짓 송사를 당해 법정에 나오고 예루살렘 산해들린법정에서 가이사랴까지 2년이 지나도록 재판결과가 나지 아니하고 총독도 자기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구금을 해놓는 이유에 대해서 해야될 일이 많은데 얼마나 속에서 분주함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런데 자기권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기의 생각은 다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기안에 올라오는 행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허상인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그립바 왕앞에 설때까지 생명을 보호하셨고 그 안에서 신학의 깊은 심오한 뜻을 아는 계시가 열리기까지 준비하게 하셔서 오늘날 깊은 계시의 말씀을 받을수있는 이 엄청난 것은 좋고 영화로운 자리에게 열려진것이 아니라 버림받고 감금되어있는 상태에서 열려졌다는 것을 알아 오늘 우리의 감금된 생활에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 개선이 되어지고 하나님과 단독으로 독대하는 계시가 열려지는 이 축복의 기회를 얻는 우리들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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