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생명을 이 그릇에 담으소서 | 구인희 | 2012-04-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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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하지 않는 변호 >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허락하노라’ 라고 합니다.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당한것에 원통하여 호소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변명하는것이 아니였습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의 변론에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전할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복음은 복음이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수용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기회가 없으면 아그립바왕은 지옥갈수밖에 없고 열조의 죄악부터 지금까지, 권세를 가지고 지은 죄악에 대해서 자기가 부활의 주님을 맞아 사함을 받고 나니까 한 영혼이라도 영원한 무지갱으로 들어가는 것에서 건져내기 원하여 더 이상은 자기의 입장을 고소하지 않는 사람이 부활의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 부활의 생명을 받은 사람 > 부활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은 이땅의 짧은 생존기간이지만 주를 위하여 사는 것은 영생을 얻기 원하는 자격을 입기 때문에 또한 그곳에 가서 자리매김을 얻는자가 되어지기 때문에 더 이상은 나로 사는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자기를 죽은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기를 원하고 배설물을 갖고 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어려움을 당해도 우겨쌈을 당해도 사로잡혀도 짓눌려도 변명하지 아니하고 죽는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악으로 진노를 쌓지 않기 원하여 죽는 기회를 주시면 바울은 신앙고백으로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부활의 능력의 증거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1. 빈무덤이 되어집니다. 빈무덤은 자기가 이미 죽었고 부활의 생명으로 시작이 되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은 자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당해도 죽은 자처럼 가는 곳마다 주의 뜻만 이루기 원하여 하나님의 뜻만 찾는 바울이 되어졌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발자취를 따라서 예루살렘 공회에서 가이사랴로 가이사랴에서 베스도 총독으로 베스도 총독에서 아그립바왕으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끌고 다녀도 나는 이미 죽은자로 여겨 가다보니까 하나님께서 복음 전할 기회를 주시는데 벨릭스앞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더니 베스도총독앞에서도 아그립바왕에게도 로마황제한테에게 까지도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2. 하늘에 속한 소망을 가진자가 되어져서 세상에는 죽은자가 못박힌자가 되어집니다 우리의 말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며 세상과 연연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사단과 음부와 무덤과 모든 육적인 것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부활의 주님은 정복하고 일어나 더 이상은 사망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시고 더 이상은 음부에 속하지 아니하고 더 이상은 사단에 송사받지 아니하고 더 이상은 무덤에 있지 아니하는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3. 부활의 능력은 사망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쏘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말씀이 생수가 되어져서 정화를 해주기 때문에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독에 쏘이지 아니합니다. 나를 만드시기 원하여 내 독을 빼시기 원하여 우리를 다루시는 과정가운데 붙여주신 심령에게 독에 쏘이고 음부가 됩니까? 좌절하고 낙망이 됩니까? 상처를 받습니까? 부활의 생명으로 건너오지 못한 증거이고 내가 아직 살아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아직 부활의 영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주님께서는 다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더 이상은 내가 죄가운데 거하지 아니하고 사망에 속하지 아니하도록 대속해주시고 죄와 사망을 완전히 끝내셨다는 것입니다.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장 1절) ” 사단은 인간의 죄를 가지고 사망을 무기로 인간을 삼키려 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의 생명으로 사망을 삼켰습니다. 사망에 쏘이는 자가 아니라 사망을 정복할수 있는 부활의 생명이 오늘 말씀으로 와계시다는 것입니다.
<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남 > 나비와 애벌레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나비는 날수가 있지만 애벌레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기힘으로 구르는 존재밖에 되지 못합니다. 애벌레는 잎을 갉아먹고 살고 나비는 날아다니면서 꽃에서 꿀을 먹고 삽니다. 나비와 애벌레의 차이는 엄청나지만 날개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노력으로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생명이 일으키는 변화로 인하여 나비가 되어집니다. 니고데모에게 아무리 부활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줘도 내가 그 길을 겪어보지 않으면 애벌레에게 아무리 나비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해줘도 이해가 안되는 것처럼 율법을 평생 준행하고 주님뜻대로 살려고 의식을 행하며 규례를 지켜왔던 니고데모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을 하니까 어미의 태중에 들어갔다 나와야 거듭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열두번을 다시 태어난다 할지라도 육으로 난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것은 영이라 아무리 내가 율리적인 도덕 선한것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본성은 본성이고 육은 육이지 이것이 하나님의 영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내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거듭남의 과정이 열립니다
< 부활의 영으로 산자 > 영적으로 산자는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로 산다고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상처였고 일생을 살아가면서 상처받고 상처투성이로 들어가셨습니다. 고난이 없이는 이 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부활의 생명, 영광의 역사를 맛보는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을 환경을 주시고 죽을 소리 듣게 하시고 부활체를 입히시기 원하여 죽기를 원하시는 주님앞에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죽기를 두려워하여 변명하고 해명하고 변론하고 온갖 거짓술수를 다 쓰는 우리 자신의 간악한 간교함 때문에 애통하는 우리가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생명을 이 그릇에 담으소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은 내안에 흑암가운데 있는 혼돈된것을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사람은 모든 사건이 구원의 사건이 되어서 말씀으로 해석하고 말씀따라 가야 됩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보다나은 본향을 향해서 가야되겠는데 사단의 소리에 사단의 독에 쏘여 주저앉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이상은 사망에 싸인자 되지 말고 사망권세 깨뜨리고 홀연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안에 있는 모든 독들이 해독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부정한 것들이 다 사함받기를 원합니다. 내안이 빈무덤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빈무덤이 되어져서 천사에 수종든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하고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인도함을 따라서 움직임을 당할수 있는 부활의 그릇되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할것은 ‘부활의 생명을 이 그릇에 담아 주시옵소서’ 눈속에 세포속에 뼈속에 피속에 허파속에 있는 거짓영을 말씀을 들을때 찬송속에 소멸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하나님앞에 상달되어 응답받는 능력의 시간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생명이 우리들의 심령가운데 담기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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