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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의 진정한 사명은 무엇인가?"(욥기 33장 1~7절 5월4일 주일 오전예배) 김영구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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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의 진정한 사명은 무엇인가?”

(욥기 331~7, 54일 주일 오전예배 말씀)

 

<요점정리>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사명을 위함입니다.

-우리 안의 패역과 강포와 혈기등을 빼시기 위한 심판을 잘 받는 자 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들려지는 메시지가 평안과 축복이 되려면, 우리 안의 패역과 거짓과 음란이 없어져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참아주시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유의지 앞에서 저주와 구원의 길에서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보내심을 받은 자리는 선지자들과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말하는 자는 주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길 원하는 기도를, 듣는 자는 하나님의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심령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하늘 문을 여는 중계자의 인생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본문내용>

-이 땅의 축복을 누리며 기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자가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자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기복에 젖은 세 친구가 볼 때, 얘기치 않은 욥의 고난은 욥의 죄로 인한 것이라며,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욥은 욥기 13장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는 죄가 없고, 회개할 것이 없으며, 전능자가 있다면 만나서 자신의 결백을 가지고 따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난을 통해 욥에게 숨겨졌던 교만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세 친구들과의 기나긴 논쟁의 끝자락에서 오늘 본문의 젊은 엘리후가 등장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의 말은 상대방을 살리는 구원의 손이 되어 심령을 살리는 말이 되어야하고, 책망을 할찌라도 사람을 살려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믿음의 사람의 말, 파수꾼의 사명을 가진자의 말은 어떠해야하는가? 진정한 구원을 위함 인가?를 한번 살펴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세우심은 하늘의 영광과 이 땅의 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을 위함 이였습니다. 욕심으로 따라 다녔던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양육을 통해 눈과 귀가 열려 이 땅의 소망이 하늘의 소망으로 바뀌어 가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믿던 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팔고, 부인하고, 저주하며 모두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죽으려고 가신 주님에 반해, 따르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영광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생 얻도록 작정된 자들이기에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가셔서 제자들을 다시금 한사람, 한사람 불러 모아주시고, 40일 후에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내 증인으로 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보이는 땅의 경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내 안의 유대라는 말씀과 사마리아라는 내 본성과 땅 끝에서 예수를 증거하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예수이름으로 복 받기를 원하는 제단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배가 부르고자, 12광주리 남고자 헌신하고 충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 사역때에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쫓아다니는 갈릴리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 십자가 까지 가게 되는데, 이것은 나도 함께 십자가에 죽는 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만 쫓더니 되는 일이 무었이냐? 라고 할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3일간 죽는 감당이 있어야 합니다. 3일간만 죽어 감당하면, 부활의 세계, 상함도 헤함도 없는 사람으로써는 능히 감당치 못하는 세계가 열려지게 됩니다. 죽으면 끝인줄 알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세상도 감당치 못하는 세계가 열려지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에 함께 죽는 자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께서는 오늘이라도 데려 가십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무엇을 하며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인간사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환란과 고난 속에 고통당하는 욥을 찾아가 도움을 주려했던 세친구와 엘리후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떠한 사명으로 자리에 있는가를 한번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면하고 가르칠때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곧게 해야합니다.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감이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는 이미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선하신 뜻과는 상관이 없게 됩니다. 변질된 자로써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는 사람도 살리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은혜 입은 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야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식해야함을 잊지는 말아야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할 진노와 저주를 바벨론 포로중에 있던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포로생활 중에서 회복을 희망하고, 꿈꾸는 자들에게, 애곡과, 침략과 기근의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돌을 들고 칠 수밖에 없는 것이였습니다. 강포와 패역들로 가득차서 술객과 거짓 선지자를 원하는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 받을 심판에 대해, 바르게 선포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습니다. 작은 기근과 고난도 아니요, 끝에는 자식들을 서로 돌아가면서 잡아먹게 된다는 예언을 전해 듣게 됩니다. 돌로 쳐서 죽일 것이 분명함에도 에스겔은 사명을 받아 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단과 책망을 잘 받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에스겔이 이러한 사명을 받을때에는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포로중의 선지자로써, 패역함이 하늘을 치솟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회복이 아니라 회개를 외쳐야 하는 것과,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는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갈릴리 사역과 같은 사역이 아닌, 우리안의 패역과 강포와 혈기등을 빼시기 위한 심판을 잘 받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빈그릇이 되어져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해진다면, 이런 심판 대신 찬송을 드리는 인생이 되어지게 됩니다. 에스겔에서는 예언을 통해 89번의 칼의 심판을 말하고 계십니다. 또한 황폐하다는 말이 40, 기근이 14, 온역이 12번이나 나옵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받고 싶지 않은 재앙들이 에스겔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있음은, 나의 교만과 패역함인 것을 알아 다윗처럼 울 기력이 없을 만큼의(삼상 30) 회개 고백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동시대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에게는 주의 말씀을 입술에 두셨습니다.(예레미야19) 예레미야선지자를 통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70년 포로생활 예언하게 하십니다. 이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내 평생, 남의 종으로, 식모로, 노예로 살아가야 한다고?”하며, 정작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선지자를 돌로 치려고만 하게 됩니다. 창조주 앞에 티끌의 모양인 우리의 모습을 알게 될 때, 포로 생활을 끝낼 수가 있습니다. 전능자, 창조의 말씀 앞에, 경건치 못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를 이 자리에 불러주심은 말씀을 듣고, 변화의 길을 가길 원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지명하신 예레미야는 그의 40년 사역 중에서 패역함으로 회개치 않는 부싯돌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눈물의 눈물로 회개를 간구하는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는 자가 되어, 우리는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 들려지는 메시지가 평안과 축복이 되려면, 우리 안의 패역과 거짓과 음란이 없어져야 합니다. 내안에 선한 것이 없기에 이러한 불의함을 빼주실 때, 훗날 심판의 날에 수족을 묶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에 내 보내지 않도록 빼내주시는 축복인것을 아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또 한 선지자 하바국을 소개하자면, 그는 이러한 선지자 가문의 스펙도, 배경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어찌하여를 외치며, 기도하던 자였습니다.(12~4) 그런 하바국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 그 패역들을 향해 멸망을 노래하던 자가, 어찌하여를 외치던 자가, “~ 없을 찌라도의 인생에 기쁨과 확신이 있는 자가 되어졌습니다.(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8) 의인은 돈과 권세와 명예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24)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리를 낼 때, 우리는 적수를 만나게 됩니다. 모두가 아멘하고 받지 못하고, 대적하고, 달려드는 자들 앞에서도 말씀을 변개치 않고, 감당해야합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유 의지를 통해 저주와 구원의 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석으로 곧게 주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십니다. 나를 맞춰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말씀으로 각을 떠서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외쳐야 될, 먼지와 티끌과 같은 우리인 것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겠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이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을 때, 주의 음성으로 받아, 주께서 주시는 복 또한 받길 원합니다. 본문의 엘리후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로써, 보잘 것 없는 젊은 청년 엘리후 그릇만 보지 말고,(1~4) 입술을 통해 증거 되는 말씀에서 주의 음성을 들어달라는 것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기를 나타내는 소리 일수도 있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두 가지로 구분되어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증거할 때, 상대방을 의식하게 된다면 사람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혀를 조심해야 하며, 나의 입과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야 합니다. 다른 이를 가르치고, 인도하기 앞서 우리는 말씀 앞에서 가장 먼저 회개하여, 내가 변화되고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자에게는 같이 듣고, 같이 살아가야할 의무 또한 있습니다. 엘리후 입장에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욥과 친구들이 주의 음성으로 듣고, 살아나길 원한다는 기도가 필요하고, 말씀을 듣는 자는 거짓 교훈에 속지 않도록, 하나님의 것인지를 분별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영광만을 구하는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 메여 있어, 성령이 붙들고 가는 인생으로 나를 먼저 살피고, 형제를 살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 엘리후처럼, 구원의 세계로 이끄는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에 비추인 내 모습>

-보내심을 받은 자리는 보내신 주의 말씀을 들고 가야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씀보다는 내 생각과 자존심, 이면, 체면이 먼저였습니다. 정말 주의 마음을 담는 자가 되어 공의의 법이 임하여, 이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인생이 되길 소망합니다.

 

<말씀으로 만들어 가실 우리 모습>

-죄가 없다고 말하는 욥, 정죄의 박사 친구들 앞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보게 하신 엘리후의 모습이 있기를 원합니다. 분별의 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먼지와 같은 자도 말씀을 증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큰 위엄 앞에서 겸손함으로 뵈옵기를 원합니다. 구원과 생명과 상관없는 말을 금하는 인생 되어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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