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들이 마시고, 행함으로 내 쉬는 살아 숨 쉬는 믿음"(약2장 14~26절, 5월7일 화요일 새벽) | 김영구 | 2014-05-07 | |||
|
|||||
“믿음으로 들이 마시고, 행함으로 내 쉬는 살아 숨 쉬는 믿음” (약 2장 14~26절, 5월 7일 화요일 새벽말씀) <요점정리>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 -삶 속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도 구원치 못하는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두고 믿음을 강조한 바울과, 할례자들을 두고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귀신 믿음 -믿음과 행위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구원을 두고 말씀을 영접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안에 귀신 믿음이 떠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되어지길 소망합니다. <본문내용> -야고보는 육신의 형인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환대를 받고 집안을 세웠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것이 귀신들린자와 같고, 모든 공회원들을 통해 죽이려고 하는 것을 보고, 집안의 망신거리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훗날 오순절 강림 이후 성령을 받고 나서야,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보아 뉘우치게 된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서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믿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거짓 믿음이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행 16~17절)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삶 속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도 구원치 못하는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서 이타적인 사람으로 살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창조 되었습니다. 하늘은 땅을 위하여, 땅은 사람을 위하여,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창조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할례 받은 자들 중에서 예수를 믿는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인과 의와 신을 버린, 행함이 없는 믿음 생활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을 두고 믿음을 강조했던 바울과 “나는 택함 받은 선민 백성이고, 나는 할례자”인 것으로 행함이 없는 할례자들을 두고 죽은 믿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의 믿음은 없으면서, 죽은 믿음, 귀신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적인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게 되어졌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행함으로 그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유익과 이용가치만을 따지는 내안의 귀신 믿음의 정체를 보는 눈이 열리길 원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어지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세상을 멀리하게 되어집니다. 뱀의 속성을 가지고 미혹케 하며, 자기 입과 자기만을 생각하던자가, 남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더러운 본성에 아무리 믿음과 경건으로 포장을 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더러운 본성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되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때문에, 스스로 척,척하는 신앙생활에서도 본인 스스로는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유대인들을 향해 지적하는 야고보서를 보고 학자들은 지푸라기 신앙이라고 말을 하면서, 믿음을 강조하여, 종교개혁의 원천이 되었던 로마서와 비교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대인을 향한 야고보서와 이방인들을 향한 로마서를 두고, 믿음과 행위의 양면을 다 살펴보아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에서 예배는 드리지만, 여전히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집니다. 하나님보다는 사단에 가까운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산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그 열매가 거짓과 위선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본체이신 주님의 마음은 희생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가증되고, 거짓된 것에서 자신을 쳐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우리의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나만한 믿음이 없다고 자부하는 유대인으로써 예수를 믿는 자들을 향해 죽은 믿음이라 지적하는 야고보입니다. 복음을 호흡하듯이 받아드렸다면 행함으로 열매가 나타나는 호흡을 내쉬듯이 나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숨은 들이시면서 내뱉는 것이 없기에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살아 있다면 사랑으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인지, 아니면 귀신들린자에서 구원받은 것 보다 돼지 2000마리를 더 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거라사인 사람들처럼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를 떠나소서” 할 수 밖에 없는 주님을 등지는 귀신 믿음을 가진 자는 아닌지 우리를 한번 살펴 보아야합니다.(19절)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어떤길을 선택하게 됩니까? 타락의 길로 선택합니까? 아니면 천성을 향해 에덴동산 복귀의 길을 택합니까? 에덴동산 복귀의 길은 우리가 한번도 가본적이 없는 새로운 길이기에, 옳고 그름으로 우리 인생의 경험에서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 길은 오직 말씀에서 답을 찾고 가야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말씀에서 정답을 찾아가, 내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스럽더라도 구원을 두고, “떠나소서”가 아니라 영접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영혼의 세계를 위해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영혼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죽은 영이기에 산 영이 왔을 때, 두려워 떨면서, 나를 떠나소서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 것은 주신분도 하나님이시기에 또 다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얘기하는 자들을 향해 형제 사랑하는 행함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23~24절) 오늘 야고보가 말하는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난 이후의 믿음생활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인 내 모습> -저 또한 믿음이 최고라 생각하며,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야, 이제야 믿음과 행위가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행위가 숨쉬기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둘을 갈라 놓을려고만 했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가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말씀으로 만들어 가실 우리 모습>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하여, 말씀을 합리화하는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공동체에서 섬김과 헌신이 나타나길 원합니다. 우리안의 귀신 믿음이 떠나고 온전한 믿음으로 성장되어지길 소망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