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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살아나면 돼"(마 22장 15~22절 5월 9일 철야예배) 김영구 2014-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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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살아나면 돼

(2215~22, 59일 금요일 철야예배 말씀)

 

<요점정리>

-주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교만 앞에 주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듣고 너만 살아나라.

-책망을 잘 받는 것이 말씀을 잘 받는 것이며, 이는 회개의 열매를 가져옵니다.

-말씀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은 올무를 통해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관계와 자기 유익을 위한 인간 관계

-외모를 정복하신 주님은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외모를 못 내려놓은 기득권자들은 고정관념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올무에 걸려는 자들 앞에서도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양육하시는 주님

-영이 우리의 중심이요, 교회가 우리 삶의 중심이며,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나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나의 악성들이 말씀을 통해 충격을 받아 떠나가길 소망합니다.

 

<본문내용>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쫓으면서, 백성들과 예수를 위해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을 듣고 너만 살아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2226~28)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 없이 중언부언하며 갈 길을 모르고 달려왔던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내 육도, 사단도, 세상도 이기시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은 하늘의 것이기에 땅의 소견인 내안의 것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무너짐은 책망과 회개를 통해 나타납니다. 결국 말씀을 통해 책망을 잘 받는 것이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동일했습니다. 말씀을 잘 듣는 심령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하든지 꼬이게 들어, 올무를 만들어 고리를 걸려고 하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자리의 대표적인 인물인 바리새인들은 구원을 받을 생각도, 말씀을 받을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 듣고 회개하길 원하셔서 예배로 부르심을 알아야합니다. 자기주장이 강한자는 절대로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스스로 옳다는 정답을 가진자를 누가 건들일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것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손댈수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들자, 그들은 자존심이 상해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자신을 보아, 무릎꿇어 회개 하는 것이 구원의 사건인데 말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그때부터, 이들은 예수를 올무 걸어 잡으려고 마음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내 죄를 보게 하시면 우리는 회개를 합니까? 아니면 잡아 죽이려고 상논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자 한다면 말에 올무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권위로 스스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던 자들이였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어, 돈과 명예, 세상쾌락을 쫓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과는 상관이 없던 자들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였기에 스스로 의로웠습니다. 자기들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자가 없다고 자부하던 자들이였습니다. 또한 헤롯당원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으면서,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행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기득권자들이였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가 다른 사상으로 인해 늘 분쟁하고 마음을 같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예수를 올무 잡는 일에는 서로가 마음을 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올무를 잡고자 하지는 않습니까? 올무는 사람을 잡을 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말씀을 자신들의 기득권으로 자기 발 아래 두길 원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였습니다. 선포되어지는 말씀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우리 또한 말씀을 내 식대로 해석하며 내 발 아래 두려고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올무를 놓을 시간이 생명을 취하고자 무릎꿇고 회개하는 시간으로 변하길 소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권력과 행정권으로 기득권을 내세우는 자들 앞에 하늘의 것을 가지고 나오는 보잘 것 없는 예수를 자신들의 발 아래 두려고 뭉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올무를 걸려고 하는 것 앞에서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말을 조심하면 올무에서 피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외모로 보시지 않기에 거리낌이 없으셨습니다.(16) 그러나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자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아부하는 말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사람을 살리고자 하나님의 사신이 되어 구원을 두고 하는 인간관계인가? 사람을 사귀어 자기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올무를 놓는 자인지 우리의 삶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외모로 보는 것 때문에 우리는 아부와 아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내 신앙이 타락하여 세상과 야합(좋지 못한 목적아래 서로 어울림) 할 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고 취하는 우리들의 아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잘 못된것입니다. 외모로 취하여 고리를 걸려고 오는 자들 앞에도 주님은 거리낌없이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창기와 세리들과도 함께 하시어 영혼구원을 위해, 외모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말에도 쏘이시지도 눌리시지도 않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반면, 외모를 못 내려놓은 헤롯 당원들과 바리새인들은 보잘 것 없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가졌다고 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 놓을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잡으려 합니다. 세를 받치는 이것이 옳은지를 물어봅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 앞에 믿음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말씀이 없어 하나님의 지혜가 모자라는 것 때문에 애통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올무에 걸려던 자들이 창조주의 지혜 앞에 본인들이 도리어 올무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을 올무에 걸려고 하는 자들이 어떤 동기에서 시작을 하였는지 주님은 그들의 악한 동기를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기득권과 스스로 옳다는 것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양육하셨습니다. 예수가 없는 자는 내가 살고 상대방을 죽이려고 하지만, 예수를 만난 자는 내가 죽고 남을 살리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들이 걸려고 했던 올무에 주님이 걸려들지 않자, 다음 기회를 보고 예수를 떠나게 됩니다.(22)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이샤의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 형상을 닮아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영이 우리의 중심이요, 교회가 우리 삶의 중심이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십니다.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나를 다루시는 환경들 앞에 우리는 감당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역사 가운데 필요한 것이기에 두셨고, 이를 통해 다루심을 잘 받을 때, 말씀이 우리 안에 안착이 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신부 자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셨기에 우리는 여기에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올무를 치고 사로 잡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예배시간을 통해 나의 고집과 나의 욕심과 올무의 텇들이 말씀을 통해 충격을 받고 내려 놓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에 비추인 내 모습>

 

<말씀으로 만들어 가실 우리 모습>

-내 유익을 위해 올무 던지는 자 되지 말고, 내 뜻과 맞지 않아 올무를 거는 자도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외모로 취하는 악습이 떠나길 원합니다. 세리와 창기들을 살리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 위로자가 되고 일으켜 세우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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