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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공의"(5월11일 주일 오전예배) 김영구 2014-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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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공의

(욥기 341~9, 511일 주일 오전예배 말씀)

 

<요점정리>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옳으십니다.

-일상에서 화답되어지지 않는 문제들 또한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인간의 불가능 앞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알게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받치라 할 때에도, 자신의 소유로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먹고 살던 우리들을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생명의 성령의 법 가운데 안식을 누리는 인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모든 일들은 옳고 그름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함을 이루고 가시는 사건인줄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은 타고난 본성의 애굽에서, 광야라는 인생과 교회 생활로 나의 본성을 꺾게 하시고, 안식이라는 그리스도인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갑니다. 광야와 교회 생활에서 악을 빼지 못하면 가나안땅, 천국을 맛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영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예수 앞에서 모두가 통일 되어지며, 아멘 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우리의 일상가운데 나나는 참 잘했는데하며 울분을 토할때가 있습니다. 욥은 누구보다 의로웠기에 이것을 통과 하는 것도,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의를 제하여 버렸다고 고백합니다.(5) 그러자 엘리후는 욥을 향해 또 다시 회개하지 않음에 죄인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욕심이 채워주지 못하는 공허함을 인생의 여정가운데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명예도, 부도,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전무후무하게 모든 것을 누렸던 솔로몬도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하였습니다.(12) 그러나 이 모든 헛된 것 가운데 헛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1213) 우리 심령에 주님이 오실 때 공허하고 헛된 것이 사라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 속의 문제들이 화답이 되지 않아 하나님을 향해 왜냐고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환경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옳은 것도 옳은 것이요, 그른것도 옳은 것입니다. 본문의 엘리후를 보면서, 시작은 뭔가 다르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신다고 했으나, 결국에는 세친구들과 같이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옳고 그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항상 따지게 되어집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품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이것은 결국에 자신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엘리후가 사심을 가르켜, 진심으로 말한다는 것, 또한 욥이 자신의 뜻을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을 옳고 그름, 선악의 길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선악은 결국 사단의 길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등장을 통해, 조금은 믿음이 있나 싶었지만 결국 친구들의 모습에서 얼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행하심은 옳고 그름을 통해, “왜냐고따질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공의 이십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악하고 선함이 없이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을 것에서 동일하게 출발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심을 인정할 때, 이해가 되어지고, 아멘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세상의 것들을 인정해주는 바벨과 내 이름을 위해 지은 바벨탑, 이러한 인생 모두가 하는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흩으셨습니다. 이러한 흩어짐의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로써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자기 이름, 자기 영광을 위함에서 구원의 관점의 눈을 열어 주신것입니다. 자기 소견, 세상 조류를 따라 가던자가 이런 흩어짐의 사건을 통해 주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 말씀을 통해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전쟁과 환란 가운데 하나님을 위지하고, 기도하며, 도우심을 얻었던 아브라함이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에, 이삭을 얻는 과정 가운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낳을 수 없는 불가능 가운데 온전히 행하신 사건을 통해, 기뻐하는것도 잠시, 다시 하나님께 받치라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맡겨주신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으로 취하여, 하나님께 드리지 못합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 우리는 왜냐고, 따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공의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기에 다시 드리게 됩니다. 이런 믿음의 검증을 통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훗날 믿지 않는 자들에게 구원을 위한 교두부가 되어주었습니다. 선악을 먹던 욥을 생명나무를 먹게 하시고자 욥에게 이런 환경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부활의 생명을 입은 자들을 생명나무 과실을 먹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는 창조의 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는 자리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도록 넘어가야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믿고 복받기를 원하는 기복에 젖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을 드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많은 심령들이 살아날 것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잡히고, 죽어,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본인에게 허락하신 축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죽지 않기를 원했기에 이런 주님의 말이 아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베드로를 향해사단아 물러가라!”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는 이것을 통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좀 전까지 축복을 하던 주님이, 사단이라 저주를 하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하고, 왜 고난을 받아야하는가? 공의의 하나님을 모르기에 우리는 늘 사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 보다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함을 이루고 가시는 것입니다. 내게 맞지 않는 환경 가운데,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고난 가운데 사람의 일을 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일이 흥하여지게 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는 흥하고 주님의 말씀은 쇠하여지는 것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나는 쇠하여지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흥하여 지는 공의의 하나님을 따르는 인생이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실패한 것으로 책망하는 엘리후, 그러나 인생이란, 실패를 통해, 성공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나누게 되지만, 하나님의 공의 속에서는 옳고 그름이 하나입니다. 죄악이 있기에 구원이 온전해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상처와, 배반들을 통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이십니다. 선악이 있어야 생명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의를 깨달아, 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원통해 하고, 억울해 하며, 불평만 늘어놓는 인생에서 감사가 넘치길 소망합니다. 빌립보서 25절에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죽기 까지 복종하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높은 본체에서 낮은 종의 형체로 오셔서 구원의 세계를 열어주신 주님과 달리 우리는 높아지고만 싶어합니다. 십자가는 저주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해 구원의 사건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자기부인을 하지 않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자는 생명의 시간을 놓치게 되어집니다. 먼저 믿게 하심은, 품어주고, 감당하길 원하심입니다. 핍박도, 저주도, 심판도, 죽음도 감당할 때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써도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핵심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 주셨다는 것 앞에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 이 사랑 앞에 옳고 그름을 어떻게 따질수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셨으나, 비둘기 하나를 쪼개지 않는, 그 작은 자기 소견이 자라나 결국에는 그 후손이 애굽에서 400년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주장을 통해, 세상 속에서 두손 두발 들고 따지고 원망하는 것이 애굽생활입니다. 이러한 악은 38년이라는 광야와 오늘날의 교회 생활을 통해서도 빼기는 힘듭니다. 이런 악을 빼지 못하면, 가나안 땅,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도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면서 임재를 놓치게 되어 천국을 누려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망을 빼시기 위해 하나님은 원망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보게 될 때, 우리는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되며, 공의의 하나님, 환경을 통해 나를 다루어가시는 하나님 앞에, 모두를 품고, 인정하는 십자가를 질수 있는 믿음까지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할까요? 얼마나 값을 치러야 할까요? 그래도 참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날 위해 십자가를 지고 가신 크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감당해주신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게 하시기 위해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품지 못할자가 없고, 용서 못 할자가 없으려면, 예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는 옳고 그름만을 따지던 자에서 생명나무 과실을 먹고 모두를 품고 살릴 수 있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내게 맞는 사람은 같이 동역하여 주의 일을 하고, 내게 맞지 않는 사람은 내 죄 보듯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앞에서 모두가 통일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 앞에 겸손히 아멘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드리는 기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만물이 하나님께로 왔고 또한 돌아가는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아니드러날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숨을 곳을 찾는 자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속해 있음을 아는자가 되길 원합니다. 책망 받을 요소를 가지고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악행이 떠나고 예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인생 되길 원합니다.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심판을 잘 받는자 되고,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인생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우리의 악들이 무너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악으로 가는자 되지 말고, 회개하고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는 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밖에 없었던 선악의 과실을 먹던자리에서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말씀 앞에 순종하며 생명나무의 길을 가는 인생 되어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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