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자기의 의로움을 하나님이 제하셨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나는 참 잘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것 때문에 울분을 토할 때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던 이것이 통과가 안되고 인정못받으니 하나님이 제하셧다고 합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로운 욥보다 더 의로운 엘리후가 나와서 지적을 하면서 의분을 토합니다.
어떻게 너는 그렇게도 회개할 줄을 모르느냐. 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돌이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른 모양을 같고 나와서 세친구보다 좀 나은것 같았는데 역시 또 옳고 그름을 따지며 욥이 절대적으로 큰 죄인인것으로 몰고가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오늘의 제목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이 백프로 옳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높은 산을 낮추시고 낮은 산을 돋구시며 공의를 세워가십니다.
지구가 해를 한 바퀴 도는것이 자전인데 이것으로 낮과 밤이 형성됩니다.
왜 낮이냐 왜 밤이냐? 우리는 원망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낮도 있고 밤도 있고 해도 있고 비 바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잔잔할 때 있으면 폭풍이 몰아 칠 때도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옳고 그름을,정답이냐 아니냐, 이런것으로 인생을 다 투자하며 허비를 합니다.
사랑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닙니다.사랑은 그냥 끌어 안아주고 품어주고 녹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 구원의 세계를 열고 가는 우리는 일생을 옳고 그름으로 옳은 소견으로 음부를 쌓아갑니다.
오늘 사랑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자는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와서 만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만나서 하나님에 관하여 가르쳐 주시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한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끌어 안고 참아내고 녹여내는 것이지 옳고 그름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하는 로선입니다.
엘리후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으로 시작하는것 같았는데 결국은 또 옳고 그름으로 가게되었고 조금 친구들보다 차원이 높지만 그게 그거라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의 가치를 높여 줄 수 있는것이 바벨입니다. 바벨을 쌓고 쌓는것이 내 이름 높이고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인간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 헛되니 하나님께서 흩으십니다. 부부관계도 자식관계도 돈에 대해서도 흩으십니다. 갈라지게 합니다. 망하게 합니다. 이것이 망하는 사건 같지만 주님의 공의의 역사로 보면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는것이 망하는 길이기에 부스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녀는 모든것을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풀어야 합니다.
흩어 질 때 비로서 우리는 주님을 찾게 되어지고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며 한번도 가보지 않은 땅을 지시하시며 말씀을 쫓아 떠나라고 합니다. 내 방식에서 내 습관에서 내 가치관에서 경험에서 본성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쫓아 갔으니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하며 대로만 열릴 줄 압니다.
오히려 가는곳 마다 기근이요 문제요 그럴때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물으시면 전쟁에 능하신 분이 도우시고 이기게 하시며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런 훈련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공의의 하나님을 알고 깨달았기에 자기의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닌 위로부터 주신것임을 알고 아멘으로 순종하여 이삭을 바침으로 믿음의 조상 순종의 조상으로 교도부를 열어 놓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어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면서도 누구 큰가를 가지고 경쟁하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여전히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이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선악을 알게하는 로선에서 얼마나 생명나무로 넘어 갔는가에는 관심도 없고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얼마나 영광을 취할 수 있는가 내가 부자가 될수가 있는가 내 모든 문제들이 풀릴수 있는가? 이런것에만 관심을 가진 우리에게 오늘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세레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더러는 선지자중에 하나라고 대답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혈육으로 아니요하나님께서 너에게 보여주셨고 이 고백을 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쩌다가 이런 복을 받아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권세를 주신답니다.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천국열쇠를 주시면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다 끝났습니다. 오매불만 이런 복을 우리는 원합니다. 그냥 음부의 권세 천국열쇠를 주고 교회를 세워주시므로서 딱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히시고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삼일만에 살아날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끝까지 이 권세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셔서 내 원하는대로 내 야망을 다 이루어지는 길을 열어 놓으셔야지 왜 죽는 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내가 길이니 "너도 죽어..." 그러니 절대로 안됩니다. 그런일이 주님께 일어날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리니 주님은 "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옳고 그름의 로선에 있으면 변덕스럽게 좀 전에는 모든 좋은 축복을 하시더니 금방 돌아서서 하는 말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니 우리는 넘어가겠죠 시험들겠죠...
그럼 사단아 물러가라해서 천국열쇠 음부의 군세 이기지 못하는 은혜가 무효됩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의입니다.
약속은 하셨지만 내 안의 사단의 소굴 왕노릇하는것은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축복과 권세의 길도 있지만 더 영광스러운 죽는 길도 열어 놓으셨습니다.그래서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은 백프로 옳으시다는 것입니다.이것이 공의입니다.
내 열심으로 내 노력으로 될것 같지만 만물을 붇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꾸 의롭다는 것을 주장하듯이 우리도 의로움을 주장하고 정죄하고 판단의 대가들이 되어 있은데 결론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만 들어가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정죄함이 없는 세계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은 만물이 주님앞에 벌거벗듯이 아니들어날것이 없는데 다 죄인인 것입니다. 등불이 나 부터 비치니깐 말씀이 딱 들어 오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죄가 크며 더 악하다는 것입니다.
내 죄가 똑 바로 보여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것이 체율이 되어지고 긍휼이 나가는 것입니다. 못감당할게 없는거예요. 저도 보혈이 필요하고 나도 보혈이 필요하고 저도 말씀이 필요하고 나도 말씀이 펼요하고 서로 동역하게 됩니다. 그러니깐 아말렉과 싸우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기도가 방해되지 않도록 지켜주고 받들어주는 아론과 훌도 있어야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여호수아처럼 현장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도 있어야 되지 어느한사람 갖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말렉은 우리 육체를 말합니다.
나는 영광받기 위함인데 죽는다고 하니 그 동안 열심이 특심으로 섬겨오고 다버리고 쫓았는데 이것이 억울하고 아멘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결론이 죽는것이기에 아멘이 안되므로 베드로처럼 그리 마옵소서 말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 마옵소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하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들을 사단아 좀 물러가라 하십니다.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을 모르고 내 악을 못보니 어찌하여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부인하라고 합니다. 그러니 맞고 안맞고가 문제가 아니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라 내가 원치 않는 것이기에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보니 내것은 쇠하여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흥하여집니다.
예수안에서 모든것이 통일되게 하시고 하나되게 하시려고 부르시고 붙드십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분으로 말미암아 붙드시고 보존하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주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주관하시고 모든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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