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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처럼, 우리도 부활의 주님께서 사용 하소서"(5월16일 철야예배) 김영구 201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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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처럼, 우리도 부활의 주님께서 사용 하소서

 

(2233~23, 516일 금요일 철야예배 말씀)

 

<요점정리>

-유대인들의 세 종파(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 당원)

-바리세인: 금식, 기도, 구제등으로 외식의 대표적인 인물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누구도 따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두개인: 대제사장들의 후손으로 그 권세가 대단한 자들이였음. 현실세계에 만족하기에 부활에는 관심도 없었고, 믿지도 않던자들입니다. 죽음에 관심이 없기에 자신의 감정과 환경을 내려놓치 못했습니다.

-헤롯당원: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에게 빌 불어 살던 자들. 현시대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였습니다.

-구원을 이루고자 말씀을 쫓은 자들은 기득권을 가진 세 종파가 아닌,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된, 죄인과 창녀와 세리들이였습니다.

-부활을 증명하려하는 성경박사들, 그러나 부활은 과학으로 해석할 수도 증명할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육적인 것과 연결 시킬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말씀을 쫓아 구원의 길을 가지만, 여전히 육이 있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가진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까지 말씀을 쫓아 가던, 믿음의 길을 포기하는 자가 아니였습니다.

-이삭의 하나님: 말씀을 쫓아 가는 인생을 통해 성령의 흐름가운데 거하는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으로 난 자이기에, 보내신 곳에서 그 뜻을 행하는 자로, 대적이 아닌 순종으로 감당하는 모습을 살게 됩니다.

-야곱의 하나님: 성령으로 난 자이지만 여전히 육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육성을 빼시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함을 받게 됩니다.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을 맛보는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시대의 하나님이 오늘 나의 그릇을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본문내용>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에게는 3가지 종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헤롯당원파, 그리고 백성들의 장로와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바리새인은 금식과 기도와 구제로 모두가 바라봐도 흠모할만한 자들이였습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특심으로 구제를 하기에 늘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상대를 무시하는 경향이 이들에게는 있었습니다. 의가 누구보다도 컸었으며, 모두에게 행위로 존경받는 인물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외식으로 하는 금식은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늘 바리새인들의 외식하는 것을 주의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사두개인들은 다윗시대때부터 내려오는 사도들로써, 대 제사장들의 후손이였습니다. 흔할 말로 뼈대 있는 가문에 땅의 권세를 누리면서 살던자들이였기에, 현실을 두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누리던 그들은 현실이 너무 좋아, 죽기를 싫어 했습니다. 현실 안주로 인해 부활에도 관심이 없었고,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세상 권력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던 자들이였고, 세상의 조류를 따라 세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였습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부활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잘 믿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은 다 알지만, 우리의 심령을 들여다보면 강도와 도적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권 앞에 기득권을 행사하기에 저 세상에는 관심이 없고, 부활에 관심이 없었기에 죽기 싫어, 자신의 감정과 환경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로마 헤롯의 정권에 빌붙어 살아가는 자들인 헤롯 당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시대의 권력을 가진자들이였습니다. 이런 기득권자들, 세상의 가치관으로 바라본다면, 누구보다 먼저 예수를 알아보고 믿어야 될 사람들이였지만, 실제는 그렇치 않았습니다. 구원을 이루고자 말씀을 쫓아간 자들은, 죄인과 창녀들이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볼 줄 아는 심령들이였습니다. 이들처럼 우리 또한 눈이 열려 자신의 죄를 볼 줄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눈이 먼 것인지 앉은뱅이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외모에 속지 아니하시는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비석을 꾸며, 회칠한 우리를 보시고, 멸망할 가증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런 우리의 심령을 보시고 주님은 우셨습니다. 이런 주님 앞에 우리는 헤롯이 지은 성전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이 있었습니다. 46년 동안이나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주님은 보시고, 다 무너뜨리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삼일만에 다시 세우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내 정체를 보는 눈이 열리길 소망합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것으로, 열심을 내며, 바쁘게 돈 바꾸고, 제물을 사는 일들을 두고, 주님은 성전을 개혁하시면서 뒤집어 엎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향해 우리는 동일하게 기득권을 가지고 질타하는 자리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또 다시 말해, 기득권을 통해, 행위로 높아질 때로 높아졌었기에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외모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주님을 향해 무슨 권세로 하느냐고 주님께 따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입으로만 가는 바리새인들, 가증하게 입으로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고, 구별하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의 주머니에는 세상의 것들로 차 있었습니다. 오늘은 사두개인들이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다보면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됩니다. 말씀은 늘 우리에게 시험하는 돌로 찾아옵니다. 내뜻과 맞지 않으면 늘 따져 보게 됩니다. 사두개인들이 오늘 부활에 대해 물어봅니다. 산자의 하나님을 믿는자는 따지지를 않고, 믿고 흐름을 따라서 흘러 갑니다. 말씀 앞에서 순수하게 믿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기득권자는 자신들이 한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기득권과 자존심으로 말씀을 믿지 않으면, 멸망의 자리로 들어가게 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합니다. 부활은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은 받은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이론으로 영적인 것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박사인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 박사도 믿지 못하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이들은 말씀대신, 유대인의 계대법을 가지고 주님앞에 논하고 있습니다. 한 가문에 후손이 없을 경우, 그의 형제를 통해 후손을 잇는 계대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올무 잡으려고 찾아 왔습니다. 죽이려, 올무 잡으려는 자들에게 주님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풀어주고, 감당하여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에 대한 오해를 하나씩 풀어 주셨습니다. 성경도 성령이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시면, 이들처럼 오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복으로 풀고, 자기 뜻으로 풀어가는 성경을 주님은 하나씩, 하나씩, 그 오해들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당장 들리지 않지만, 말씀 앞에 붙어 있다보면, 때가 될 때, 눈과 귀가 열릴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부활을 논하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32)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강건너 우상을 섬기던 자들에서 구원으로 부르시고, 예배의 제단을 쌓아가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함도 있지만, 육은 여전히 있기에, 부인을 팔아 넘길 수밖에 없고, 시험이 올 때, 세상으로 피난처를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끝까지 말씀을 쫓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나는 세계인 이삭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흐름을 쫓아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는 성령으로 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보내신 곳에서 그 뜻을 행하기에, 대적이 아닌 순종으로 감당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영, 성령으로 난 자는 예수가 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난 자이지만, 여전히 육을 가지고 있어, 돈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고, 거짓말 하기 좋아하는, 속이기 좋아하는 야곱의 속성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육성을 빼는 과정을 통해 야곱은 험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불신자에서 예수를 믿어 구원의 길을 가는 우리는 오늘날의 아브라함입니다. 말씀을 통해 불러주시고, 다루시는데, 우리의 힘이 다 빠지기까지 다루십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시작된 때는, 자신이 야곱이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구원의 세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게 되어졌습니다. 이러한 것이 될 때, 부활이 찾아 오게 됩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즐거움은 결혼인데, 이 기쁨이 일곱 번일찌라도, 부활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기쁨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것은 세상것과는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를 올무잡으려는 자들은 억지로 연결지으려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시떨기에서 만나주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시대 시대마다 그릇을 통해 역사하심이 오늘날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인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죽은 것 같지만, 그 그릇을 사용하신 하나님은 현세의 것만을 가지고만, 판단하는 우리들을 향해 창조의 하나님이 동일하게 이 시대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기득권으로 내가 무엇인가 하나님께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주님은 쓰실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악과 연약함을 인정하며, 주의 도우심을 바랄 때, 주님은 나를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부활의 영이, 야곱도 부활의 영으로, 이삭도 부활의 영으로, 오늘날 우리도 부활의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을 넘을 수 있고, 나의 본성을 넘어 자유함 속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세적인 기득권 앞에 자기 만족으로 살아가면서 이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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