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능력을 입게 하소서"(욥기 35장 5월 17일 주일 오전예배) | 김영구 | 2014-05-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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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능력을 입게 하소서” (욥기 35장, 5월 17일 주일 오전예배 말씀)
<본문내용> -오늘 본문에서는 겸손으로 시작하였으나, 결국에는 친구들과 같은 결과를 향해 가는 엘리후의 모습을 보면서 아쉬움이 많이 들게 됩니다. 나의 “의”인 엘리후가 겸손으로는 나왔으나, 지나친 자신감으로 오늘 본문에서는 욥의 상황을 앞서가는 억지가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고난을 당하여, 내 일평생의 열매가 이것입니까? 하고 원망과 분냄도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감당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능자이십니다. 고난은 힘들지만, 언젠가는 이해가 되어지고, 유익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어가는 상대방을 두었다면, 우리는 감당해야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 주어야 하는 돕는 배필의 사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엘리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숨겨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벗어야하는 괴로움이 있겠지만, 이를 감당해야만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 앞에 우리는 자신의 본심과는 상관없이 말할때가 있습니다. 욥은 고난 앞에 불평을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고난 가운데 불평을 할 수도 있는데, 이를 가는 과정으로 보고 감당하고 들어주는 역할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신령적으로는 보좌 앞에 까지, 말씀이 열렸으나, 진리적으로 겪고 가야하기에 넘어지고, 쓰러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피 할 수는 없기에 먼저 간자는 따라오는 자를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길을 가면서 세상에서 들려지고, 보여주는 것은 내 심령의 성전에 들어오지 않도록 깨어 있어 말씀으로 무리 쳐야 합니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언제인지 모르게 내안에 매복이 되어, 후에 이것이 죄를 짓는 이간과 비방의 것들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짓는 죄들을 회개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인줄로 믿습니다. 회개를 하는 자는 구원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신앙이 회복되어져야하고, 회복시켜야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2절과 3절은 우리가 너무나 잘하는 고백입니다. 믿음의 길 가운데, 어려움이 오면,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잘하였는데, 왜 이런 고난이 오는가? 하고 주님께 따지게 됩니다. 선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에서, 경건은 하나님의 성품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 하나님의 신의 성품을 상속받기 위해서, 삶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양육해 가십니다. 경건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죄를 100%로 인정하고, 선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여,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설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딤후 3장 5절) 직분의 권위 대신, 직분에 맞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딤전 3장 1절)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돈과 명예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옳고, 잘났다고 자긍하며,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의 신분을 잊어 버린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려야하는 하는데, 성령을 훼방하고, 구원을 훼방하게 됩니다.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를 무시합니다. 멸망에서 천국으로 갈수 있도록 나에게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는데, 우리는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고 거역을 하게 됩니다. 또한 감사치 않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참지 못하고 무정합니다. 이간질하며 참소합니다. 말과 행동과 시간에 절제하지 못합니다. 사나우며, 쾌락을 좋아합니다. 이 모든 열매들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에게서 나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안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자기도 구원하지 못할뿐 아니라, 남도 구원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어집니다. 경건의 능력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말과 행동들이 섞어질 것에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열매는 개인주의, 세상적이고, 극단적인 것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에서 나오게 됩니다. 욥이 아무리 훌륭하게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다 보니 경건의 능력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쌓아주고, 인정해 줄 때, 잘나갈 때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 입에 조금 쓰더라도 감당하여 바른길로 가길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건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역의 영을 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방식대로 믿어, 내뜻, 내 생각, 내 감정을 사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 가지 복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많은 이들에게 헌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 말씀대로 가는 지식을, 또한 쓰임 받음에, 교만치 않는 절제를 해야하고, 이를 감당해야 되다 보니 인내가 오게 되고 이러할 때 우리에게는 경건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듯이 아니다 보니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형제 사랑의 최고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경건은 외면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것입니다. 경건은 아부하고 아첨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한자는 교회를 생각해 옷깃을 여미고, 형제를 위해서는 정직하게 돕는 자로 들어가고, 말씀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사랑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동방에서는 최고의 의인이였으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허상임을 고난가운데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구원을 위해서 정직의 영이 나가길 소망합니다. 빌립보서4장 8절에서 바울은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는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해야되고, 옳아야하는데, 이것이 안되기 때문에 애통하고 자복하고 가야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자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선악을 먹는것에서 생명이 없음을 두고,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껏 경건의 모양만을 가지고 있자리에서, 이것을 지적받을 때, 감당하여 경건의 능력을 입는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는 것인데, 참 아버지를 못 만나 고아로, 참 신랑 주이신 예수를 못 만난자가 과부입니다. 더 늦기전에 예수를 믿어 고아와 과부에 있던 우리들이 이제는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경건의 능력을 얻도록, 경건의 연습을 하길 소망합니다. 자존심, 이간질등 내안에서 이러한 것이 올라 올 때, 참아내고 감당하는 경건의 연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의 생활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 고넬료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참으로 경건한 자였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자였습니다. 우리가 경건하려면, 구제를 하고 하나님께 항상기도하여야 합니다. 왜 구제를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구제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내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힘든일입니다. 그러나 구제는 경건을 얻게 합니다. 항상 기도함을 통해 고넬로는 하나님의 환상가운데 만나게 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의 만남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배를 같이 드리게 되고 베드로가 만난 성령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온가족이 받게 됩니다. 또한 경건은 이사야서 6장에 소개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아멘 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경건의 능력을 입을수가 있습니다. 또한 시편 38편에 소개되는 주께 감사하는자, 감사의 조건이 없어도 감사하는 것이 경건의 능력을 입는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원망하고 주님을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경건하려면 입에 재갈을 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방, 이간, 생각없이 하는 말을 금하라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 형제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구원의 진실한 기도를 드리는 입술이 되길 원합니다. 욥도 이러한 진실한 기도를 못했고, 엘리후도 이런 것을 보고 자기의 진실한 기도를 못드림을 보아야하는데 그렇치 못했습니다. 똑같은 우리들에게 오늘 필요한 것은 진실한 기도인줄 믿습니다. 어려움 앞에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따지지말고,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찾아보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고난 가운데 기도할수 있음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명심하고 나의 본성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고, 이제는 경건의 능력을 입길 소망하며, 경건의 연습을 하는자가 되길 원합니다 헛된 부르짖음, 전능자가 돌아보지 않는 기도, 수없이 기도는 드리지만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 기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해 사람을 향해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을 하나님은 당신을 행해 원망하고 비방하는 것으로 보십니다. 반면 형제에게 물 한그릇 대접한것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충성과 헌신이 있어도 왜 변하지 못하는가? 내안의 바위와 같은 죄악의 육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십년 믿어도 이런 바위덩어리를 옮기기전에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하기에 경건의 능력을 입을수가 없습니다. 말씀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바위때문임을 알아야하겠습니다. 평생에 예수를 믿어도 악하자가 되어 경건의 모양만을 가진자, 말씀을 부인하고 자기를 인정하는자에서 돌이키길 원합니다.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한 인생으로 경건의 능력을 힘 입길 소망합니다. <드리는 기도> -가증하다하지 않으시고, 주님 앞에 불러주셔서 경건의 연습을 통해 구제와 기도를 힘써, 하나님의 영을 받은 고넬료의 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원망과 불평의 입에 재갈을 물려, 감사의 입술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뜻 앞에 “내가 여기 있사오니”하는 순종의 고백이 있길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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