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의로움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으며 잠시라도 하나님을 포기 하거나 의심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자신의 경험속에서 아멘이 안되는 겁니다. 무슨 소리냐면
하나님을 자기식 하나님으로 빚어가지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럴것이다고 믿는것이 송아지우상을 숭배하는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내 귀에 듣기에 즐겁고 내 원하는 길을 가게하고 원하는 일을 하게 하고 원하는 말을 하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니 백성이 만든 그들을 인도할 신은 바로 귀거리로 손목거리로 입거리로 부어 만든 송아지우상입니다.
그러니 추상적으로 내가 믿는 하나님 자기 기준에서 빚어낸 하나님이 욥에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내 원하는것 내 부족한것을 채워주시는분 나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자기식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욥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을 못하고 나니깐 오늘 고난이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잘 믿었는데 나는 의롭게 살았는데 나는 죽도록 충성 했는데 내 인생에서 구제도 많이 했고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 왔다는 것도 인정하였는데 내가 잘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복주셨던것 아닌가?
이러면서 자기 스스로도 너무 의롭고 정말로 믿음이 누구 보다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왔을까? 왜 이런 저주를 받아야하는가 친구들에게 이런 비난을 받아야하는가 이것이 욥이 격고 있는 믿음의 한계입니다.
그러니 자기 죄를 못 보면 고난이 해석이 안됩니다. 자기 죄를 볼 때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내 삶의 결론 임을 깨닫고 뼈저리게 회개하며 애통합니다. 삶이 해석이 안되니 원인 모를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격거야 되는가 원통하며 분하여 못삽니다.
자기 죄를 아는 자는 무엇하나 버릴것이 없습니다.
내 죄를 내 악을 빛으로 보게 되면 묵묵히 환경에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을 왜 집니까 내가 통회하고 이것이 내 죄라고 인정이 되니 감당이 되어지고 그러다보니 견디는 힘이 위에서 주어지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욥이 깨트려져야 합니다.
인과응보의 원칙을 갇고 나오는 세 친구의 기준도 깨시기를 원합니다.
또 세상 복을 주니 믿는 다고 하는 사단의 조롱도 깨트려야 합니다.
욥의 친구 같이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전공한것이 있는데 바로 정죄학과 입니다.
무엇을 보면 우리는 먼저 정죄를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누구 잘되는 꼴을 못봅니다. 믿음으로 서가면 조롱하고 비방하는것이 사단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복을 줘 보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의로 넘어가기 전에는 자기 공로 자기 생생냅니다. 자기만한 믿음이 없어서 축복 받는 줄로 알고 있으니 어느것 하나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원어에는 베헤못인데 복수의 표현으로 집승들 이라고 해석이 됩니다.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라고 정복하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 땅을 살면서 저 우주적인 짐승을 다스립니까 내 안에 짐승의 속성을 적복하고 다스리는 거죠.
짐승들이 내 심령가운데에서 성산이 되어져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보좌가 있으면서 생명의 말씀이 생수처럼 쏟아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역사가 일어나야 될 줄 믿습니다.
베헤못이라는 이 하마가 소처럼 풀을 먹습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땅의 것을 먹게 되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먹어야 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였는데 이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주의 형상이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영의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땅의 것만 먹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땅만 바라봅니다.
그리니 베헤못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될 하나님으로 지으심을 받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대적하고 자기를 사랑한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게한 내 안에 각종 짐승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하는 죄는 어떤 포장을 하고 들어오는가 하면 너무 착하고 너무 친절한 광명한 천사로 등장을 합니다. 처음에는 유익을 주며 흠모할 만한 모습으로 들어옵니다. 사단은 내가 너를 하나님처럼 되게 해줄게라는 미끼를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에게 내 피를 내 살을 떼어 주고 유익을 끼칩니다.
자기 사랑의 능력 그 힘은 그 용망은 얼마나 대단한지 모두가 다 자기것 자기 전유물입니다. 다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기를 원합니다. 허리에 힘이 얼마나 쎈지 한번 계획하고 정하면 절대로 양보할 줄을 모르고 고칠줄도 모릅니다.그래서 자기 사랑은 누구도 못 꺽습니다.하나님 많이 꺽으실 수 있습니다.
내면과 왜면 걷사람이나 속의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것이 워낙 내 기준이나 내 자아가 강하기 때문에 모든것이 그를 힘있게 합니다.
베헤못이라는 이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누구도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다 먹어 치우고 자기의 소유물로 만듭니다.
겉으로는 광명한 천사 같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사랑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소음이 너무 많습니다. 다 자기가 했다고 합니다. 자기 사랑, 이 베헤못은 용망이 가득합니다. 가고 싶은 곳은 다 가야하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하고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존경하고 자기 숭배를 합니다. 모든것이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며 내가 내가 하는 소음으로 자기 사랑 자기 자랑합니다.
21-22절 베헤못이라는 이 짐승은 물속에 들어가면 물속에서 몇시간도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죽지도 않습니다 그냥 물속에서 바위 틈에서 숨으면서 죽은 듯이 있으면 정체가 잡히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황홀감에 얼마나 고요함속에 깊이 잠자는것 처럼 평안함을 주기 때문에 그 미혹의 영은 깜박 속입니다.
자기 사랑하는것이 이렇게 교활하게 역사를 합니다.
오늘도 눈물로 회개하며 하나님 사랑을 위하여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애통하는것 외에는 이길 힘이 없습니다. 무덤인걸 알면서도 지적하고 파해치는것을 원치 않고 안 죽으려고 떠나겠다는 자들을 향하여 삼년반만 참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하며 멸망의 길을 가는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한 때 두 때 반 때를 대환난으로 밟아가지고 들어나게 해서 회개하게 해서 자기권세 다 깨지게 해서 부활의 생명 받게하시는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내 죄를 인정할 때 한 때 두 때 반 때 양육해가면서 지적하시고 책망하시고 깨닫게 해서 무덤대로 살지 않고 생명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내하여 이 환난을 아멘입니다. 고백하는것입니다.하나님은 의로웠던 욥을 이 환난을 통하여 스스로의 믿음의 정체를 보게하시고 내면의 베헤못을 자기사랑을 빼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욥을 터치하니깐 불평이 나옵니다. 그러면 성산이 안됐다는것입니다. 믿기는 믿었고 산울로 둘러 진친것으로 복 받았고 이것이 믿음인줄 알았는데 근원으로 들어가 보면 자기 사랑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욥은 자기 안에것이 베헤못이라는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생명을 내놓습니다. 자기 죄 자기 악을 알기에 아멘입니다. 인정하고 감당합니다. 그러니 다른것이 아닌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세마포로 옷을 입힙니다.
짐승은 내가 맞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길들이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으로 아니라 내 안의 것을 빼는것입니다. 다 빠지면 원수는 없어집니다. 자기 권세가 깨진 갈렙은 주님이 쓰실 때 까지 잠잠히 기다립니다. 내 자존심 내 이면체면이 문제요 내 교만이 문제라 맨날 주줄거리며 할 말이 많은 것이지 내가 십자가 적용해서 내가 죽은 자가 되고 더 이상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는 세계 오후 길에 들어가면 기다릴줄 알고 잠잠할 때를 알고 말하고 보내실 때를 압니다. 내 때는 다 죽었습니다. 성도의 권세가 다 깨졌습니다.
베헤못의 특징은 자기 뜻대로 해야 합니다. 내 입맛대로 먹어야 합니다. 내 생각 대로 되어야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높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왜 천국을 못 누립니까 내 뜻대로 안돼서 입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증거만 받고 왔던 욥이 이제는 고난을 통하여 내 악을 보게 되고 밟히더라도 감사하는 눈이 열린 욥이 되어 아멘입니다. 내삶의 결론입니다.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안에 악을 자기 사랑을, 베헤못을 빼시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원통합니까?
못마땅합니까? 내 죄 때문에 모욕당하는거 내 삶의 결론이기에 심판받는데 왜 못받아들입니까? 세마포옷을 입고 싶고 천국을 누리고 싶으면서 자기 죄 때문에 값을 치루는데...
내 안에 우상 빼자는건데 내 안에 교만을 꺽자는건데 내 안에 하마를 쫓아내자는데 뭐가 그렇게 억울할까요? 그렇게도 분합니까? 마땅하지 않습니까?
살리겠다고 허락하신 고난이요 밟히는것인데 말입니다.
말씀이 안들리고 해석이 안되는 것 때문에 애통이 나가야 합니다.
핍박을 해도 조롱을 해도 너를 죽일지라도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눈물로 기도로 풀무불을 이기는 권세를 받아야합니다.
그냥 죽을 수 있는 권세를 받고 용서 할 수 있는 권세도 받고 그래서 내 안에 악신이 무너질수 있도록 용광로에 집어 너어서 나를 밟으면 밟을 수록 참아내고 견뎌 낼 수 있는 권세를 위로부터 기도로 받으셔야 합니다.
그 길이 우리 가는 길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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